나의 집이 가정교회였다

나의 집이 가정교회였다

[ 목양칼럼 ]

윤병수 목사
2022년 09월 14일(수) 08:03
1999년 3월 7일 중국에 첫발을 밟고, 이튿날 가정교회로 안내 되었다. 가정교회 지도자가 힘들어서 사역을 포기하려 하니 힘을 주라는 것이었다. 가정교회가 어떻게 생겼을까? 지하에 있는 것인가?

가정교회 지도자의 집에 도착했다. 마당을 지나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우리나라 시골집의 부엌 대문이었다. 문을 여니 부엌이 흙바닥이었다. 그리고 문도 없는 커튼만 걸쳐져 있는 방이 바로 보였다. 방 하나가 살림집이요 가정교회다. 가정교회 지도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힘드신가요?"

처음에 집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는 마을 사람들이 호기심과 도움을 받으려고 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에 도움을 주면서 보람도 느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고 힘들게 하여 그만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마가복음 4장 39~41절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을의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도록 기도하며 위로와 격려를 하였다. 그때 나의 마음에 생각을 주셨다. '나의 집이 가정교회 였구나! 가정교회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게 하신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중국의 가정교회를 도우라고 나의 집을 가정교회로 세웠구나! 중국에 선교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가정교회의 아픔을 아는 나를 그래서 보내셨구나!'

어느 전도자의 전도로 나의 아버님은 마을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버님, 어머님, 형, 동네 아주머니 한 분, 전도자 이렇게 우리 집에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마을에서 쫓아내려 하였다. 들판의 볏단에 불을 지르며 온갖 위협을 하였다. 아버님이 6.25 전투에 나가시고, 당시 세 살인 형과 함께 어머니 혼자 교회를 지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때다 하여 몽둥이를 들고 교회를 부수려 몰려왔다. 연약한 어머니는 교회 담장 벽에 두 팔을 벌리고 붙어 섰다. "나를 죽여라! 교회(가정)는 못 부순다". 이것은 필자가 부목사로 사역할 때 우리집에 잠깐 머무시면서 전해주신 이야기이다.

한국교회의 시작도 가정교회였다. 한국교회의 뿌리인 가정교회 지도자와 자녀들이 당한 힘든 일들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일들이 중국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아픔을 잘 알기에 나의 가정 이야기를 시작하여 내가 목사로 여기 와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말하였다. 저주의 집안이 축복받고, 나는 목사가 되어 여기 왔으니, 형제님의 가정과 자녀도 이런 축복이 있음을 선포하였다. 형제님은 힘을 얻어 다시 열심히 사역하기로 하였다. 가정사역자들이 힘을 얻어 전도하여 3년 동안 약 20개의 가정교회가 확장됐다. 현재는 약 75개 가정교회를 이루고 있다.

필자는 지금의 한국교회도 개척을 가정교회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러시아 단기선교 갔을 때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선교는 앞으로 가정교회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대화해 보니 가정교회를 잘 모르고 있었다. 농사도 짓고(각자의 은사로 활동), 목회사역도 하고, 자립, 자치, 자전하는 사도바울의 선교적 교회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척하는 나의 집이 교회당으로 헌신 되어, 이웃집 형제자매를 초청하여 교제를 나누는 소망을 꿈꾸어 본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 20)



윤병수 목사 / 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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