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여전도회 지원으로, 중국에 파송한 첫 여성 선교사

1928년 여전도회 지원으로, 중국에 파송한 첫 여성 선교사

[ 선교여성과 교회 ] 김순호 선교사 이야기 ③

정안덕 박사
2022년 08월 10일(수) 11:15
1931년 9월 11일, 금강산기독교수양관 제4회여전도회총회 "김순호 산동 파송" 기념. 우측 상단은 김순호 선교사이다. 조선의 여성도들, 모두들 정결히 차려입은 흰 한복이 인상적이다(한국기독공보 디지털 아카이브 2008-05-10 11면).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 그것도 엄연히 '꽃'이 아닐 수 없으니, 산과 벌판에는 온갖 꽃들이 각기 형편에 맞춰 야생하고 자생하듯, 우리나라 초기 중국 선교 역사에 있어서, '파송'이라는 공인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어떤 도경으로든 중국 땅에 들어가 도처에 뿌리 내려, 무명 선교사의 삶을 빛 없이 산 조선인 신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오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 이들을 통해, 마치 나무뿌리가 어떤 '정해진 경로' 만을 통하지 않고, 수분을 좇아 제각기 사방으로 뻗쳐 나가 생존하듯이, 중국 선교의 토양 역시 자고이래 처처에 예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결코 잊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와 같은 신앙적, 사회적 그리고 선교적 토양 위에서, 김순호(1902~1951)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조선여전도회연합대회의 단독 지원으로 중국인들을 위해 파송하여 사역한 장로교의 '첫 여성 선교사'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파송 절차를 거쳐 공인되었다.

# 산동 파송(1928~1931)

일본의 잔혹한 압제에도 불구하고 1928년 전후의 조선 교회는 오히려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장작은 많이 때면 땔수록 더 뜨겁고 맹렬한 열을 품어 내듯, 외부적 압력이 크면 클수록 조선 교회의 내적 역량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1928년 9월 8일 대구 신정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7회 총회는 '여선교사 중국 파송 문제'라는 획기적인 안건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고,제1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의하면, 외국 전도부장 차재명 목사의 보고는, 남성 선교사 위주로 운영되어 온 산동 선교에 '여성을 위한 여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현지 선교부 자체의 요청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 이듬해인 1929년 제18회 총회에서는 그 의지를 더욱 구체화시켜, "우리 여성" 선교사를 세워 "중국 여성"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는 특별한 선교 사역을 "장래 경영"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총회의 그러한 의지에 부응하여, 1928년에 창립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연합대회는 1929년 9월 새문안교회에서 제2차 총회를 갖고, 여성 선교사의 중국 파송을 결의한다. 1930년 9월 8일 여전도대회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제3회 총회를 열어 산동성에 여선교사 파송을 결정하고, 총회 선교비를 먼저 지원하고 남은 선교비 520원을 적립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931년 3월 4일부터 교계 신문인 "기독신보"에 여전도회가 "중화민국 산동 여선교사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다음과 같은 공모를 낸다.

"조선예수교장로회 교인인 여자로서,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원(혹은 신학교)을 졸업한 자, 그리고 모집 현재 교역(敎役)에 종사하는 자로 충분한 성경 지식과 사역 경험이 있는 자, 그리고 연령은 25세에서 만 30세의 독신자이어야 한다."

그와 같이 비교적 높은 기준을 내걸었으니, 조선 장로교회 최초로 중국에 보내는 여성 선교사였기에, 중국인 부녀자를 가르칠 능력과 자질을 갖춘, 가급적 온전한 이를 천거하고자 했던 교회의 신중한 열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한 모집 규정에 부응하여, 산동 여선교사는 김순호로 낙착된다. 그 인선의 이유는,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의 그에게 양호한 품성과 출중한 능력뿐 아니라, 뜨거운 애국심과 더불어, 독신 여성으로서의 전적인 헌신과 불같은 선교적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성 선교사 한 사람의 파송이 온 교회에 그리도 중차대한 사업이었으면, 정작 선교사 본인에게는 그에 따른 중량과 압력이 오죽하였으랴? 선교사 인선 결정을 통보받은 김순호는 고향인 황해도 장수산을 오른다. 재령동부교회 김용성 담임목사와 40여 명의 청년 교우들이 합세했다. 기도로 함께 영적 무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밤을 새워 힘써 기도하는데, 느닷없이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난 것이다! 김순호는 심한 공포에 질려 어쩔 줄 몰랐으나, 김 목사님의 "깊은 기도로 들어가라"는 권면에 기도를 멈추지 아니했고, 기도하다 잠이 들어 깨어나니, 고요한 아침 날이 새어 있었다고 한다.

이제 곧 들어가야만 하는 '중국', 조선의 이 독신 여성에게는 어쩌면 거대한 한 마리의 '호랑이'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장수산 기도로 무장한 김순호는 주님이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었고, 용기를 내어 선교지로 향할 수 있었다.

김순호는, 그와 같이 영력 면에서 강하고 담대하였지만, 생활면에서는 무척 검소하여, 여름에는 흰 당목 치마저고리를, 겨울이면 까만 물 들인 당목 치마저고리를 해 입고 다니며, 혹 새 옷이 생기기라도 하면 서슴없이 다른 이들과 나누었다고 조카 김병숙은 회고한다. 그리하여, 당시 그의 큰 믿음뿐 아니라, 그러한 온정의 소문이 교회 담을 넘어 온 재령에 자자하였으니, 1931년 김순호가 산동 선교사로 고향 땅을 나설 때에는, 재령 사람들이 신, 불신을 막론하고 재령 역전을 가득 메워 환송해 주었다고 한다.

드디어 1931년 9월 11일, 제4회 여전도회연합대회는 금강산기독교수양관에서 열린 총회 마지막 날을 기하여, 선교사 파송예배를 거행한다. 산동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 1930년 1월부터 이미 520원을 적립하고 있었던 여전도회는 김순호 선교사를 위해 봉급과 어학비 600원, 여비 30원을 포함한 총 1130원의 선교 사업비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김순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결의와 인준과 아울러 전국 여전도회연합회의 인선과 지도를 거친 후 중국으로 파송됨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안덕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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