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의 일치

반대의 일치

[ 인문학산책 ] 66

최신한 명예교수
2022년 07월 27일(수) 09:11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지식'과 '지혜'는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지혜는 성경과 고전에 많이 등장하는 용어로서 정확한 이해를 요구한다. 지식은 개별적 대상에 대한 객관적 필연적 앎을 지시한다면 지혜는 전체 존재에 대한 궁극적 파악을 뜻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철학(philosophia)의 원래 뜻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서 지혜에 해당하는 것은 이론의 궁극으로서의 '진리', 실천의 궁극으로서의 '선', 취미의 궁극으로서의 '미'이며, 이 셋을 아우르는 '성스러움'이다. 진선미성(眞善美聖)을 사랑하는 철학은 경전의 가르침과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골로새서(2:8)에서 철학을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번역한 것은 그 원래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철학에 대한 과도한 평가절하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원어는 이 말을 '세상의 원리'로 표현한다.

지식은 예로부터 특정 대상에 대한 객관적 필연적 지식을 일컫는다. 대상이나 사실에 대한 개인적 견해와 달리, 지식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으로서 상황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지식의 대표는 과학적 지식이다. 지식 일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산출과정이 객관적으로 보증되기 때문이다. 어떤 실험실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 때 그것은 비로소 지식으로 인정받는다. 지식의 산출은 인간의 능력 가운데 이성(ratio)이 담당하며, 이성은 파악하려는 대상을 다른 대상과 비교함으로써 각각을 구별하여 판단한다. 이성적 지식의 원리는 동일률(A=A)과 모순율(A≠-A), 즉 같음과 다름이다. 대상과 이성이 일치하면 이성이 파악한 내용은 참으로서 지식으로 채택된다. 이에 반해 양자가 불일치하면 그 내용은 거짓으로서 지식에서 탈락한다. 이성은 대립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능력이다.

쿠자누스(Nikolaus von Kues, 1401~1464)는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에게서는 모든 대립과 반대와 모순이 소멸하며 모든 것이 일치한다. 이성이 개별 대상을 모순과 대립을 통해 파악하는 것과 달리, 반대의 일치를 파악하는 능력은 지성(intellectus)이다. 이성이 대립을 통해 지식을 획득한다면 지성은 대립적 지식의 근원과 접촉하는 능력이다. 이성은 홀수/짝수를 통해 자연과 세계를 파악하는 반면 지성은 홀수/짝수의 차이가 없는 이성의 뿌리와 접촉한다. 지성은 이성의 뿌리와 접촉하면서 개별 지식을 능가하는 지혜를 가져다준다.

쿠자누스는 반대의 일치를 기하학의 맥락에서 설명한다. 실제 세계의 원(圓)은 부정확하고 제한된 것이라면 무한한 원은 실제적 원의 원상이다. 무한한 원은 무한한 선(線)과 일치한다. 원을 무한히 크게 하면 원을 이루는 곡선은 직선으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삼각형의 저변을 무한히 연장하면 삼각형은 일직선이 된다. 이러한 설명을 따라가면 '무한한 선은 무한한 삼각형이며 무한한 원이며 무한한 구이다.'

반대의 일치는 모순된 것들의 일치로서 가장 단순한 통일성을 향해 나아간다. 반대의 일치를 넘어서는 단순한 통일성은 신에게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통일성은 모든 개별적인 것들에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대립에 대한 대립이며 대립이 없는 대립이다. 유한성에 맞선다는 의미에서 대립에 대한 대립이지만 아무런 대립자도 없는 통일성이라는 점에서 대립 없는 대립이다. 수(數)가 현실 속에서 외적으로 펼쳐진다면 신은 모든 수와 다수성을 펼쳐내는 수의 원리이다. 신은 반대의 일치 너머에 있는 단순성, 통일성, 무한성이다.

흥미로운 것은 쿠자누스가 반대의 일치를 무지(無知)의 원리로 본다는 점이다. '아는 무지' (De docta ignorantia)에서 무지는 인간의 고유한 결핍인데 이 결핍을 극복하면 최고의 앎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세계와 인간을 전체로 파악하고 통일적으로 아는 앎의 최고단계이다. 이러한 절대적 통일성은 모든 생명과 존재와 인식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의 일치 저편에 순수한 동일성으로 전제되어 있을 뿐이다. 지식을 산출하는 이성은 비교를 통해서 대상을 상대적으로 인식하지만, 지성은 절대적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와 마찬가지로 반대의 일치에 도달한 지성은 무지의 원리를 깨닫는다. 이 무지의 원리에서 인간은 신과 무한자에 대해 알 수 없는 유한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반대의 일치를 직관한 지성은 신의 존재를 확실히 체험한다. 쿠자누스는 신에게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었다. 중세 말기에 부정신학과 긍정신학의 접점을 제시한 것이다. 근대에 오면 신은 절대 동일성으로서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이념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념은 인간의 주관성 바깥에서 주관성 안으로 들어온다. 요컨대 지혜는 신에 대한 통일적 부정적 앎이라면 지식은 유한한 세계에 대한 개별적 긍정적 앎이다. 반대의 일치를 통해 설명했듯이 지혜는 지식의 전제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잠언의 저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최신한 명예교수 / 한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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