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평화·공존 추구하는 지구 생명 공동체 형성해야

안전·평화·공존 추구하는 지구 생명 공동체 형성해야

[ 선교여성과 교회 ] 포스트코로나 교회 구조 변화와 목회·선교 방향 ④

김영동 교수
2022년 06월 08일(수) 13:15
지난 5월 31일 여전도회관에서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여전도회원. / 한국기독공보 DB
복음은 세계적, 우주적 차원의 진리다. 교회는 모든 인간적 경계선과 장애물을 뛰어넘는 생명 공동체다. 코로나19 감염병 이후의 세계는 안전과 평화와 공존이 공적 소비재화 내지 우선적 가치로 등장한다.

이러한 우선적 가치의 변화가 선교에 주는 도전은 예배 신학의 변화와 새로운 형태의 예배에 대한 창조적 계발이다. 교회가 앞장서서 오늘의 위기를 '예배의 위기' 보다는, 혹은 함께 '선교의 위기'로 인식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자신의 정체성과 본질을 내려놓고,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으로 성육신하시고, 자기를 비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원을 이루셨다. 성령님은 모든 막힌 담과 단절된 관계를 넘어 사람과 문화를 새롭게 변화하도록 임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자기 비움과 낮아짐으로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사로잡힌 자, 소외된 자, 약자들에게 성육신하시고, 마침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여셨다.

속히 예배가 회복되고 성도의 공동체의 교제와 친교와 나눔과 사귐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처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서로 나누고, 서로 돕고, 서로 배우고, 서로 축복하는 공생을 이루는 기회로 이 어려움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겠다.

"대면 예배를 못 드리는 것보다 더 가난한 자영업자들의 몰락을 슬퍼하는 목사, 교회가 출현할 때이다. 교회보다는 온 인류의 생존공동체 전체의 안전, 평화, 생존과 번영을 위해 기도하는 지구공동체의 대제사장 역할에 더욱 충실할 때이다."(김회권, '포스트코로나 신학 도전과 응전')

"예배는 선교로 흘러넘쳐야 하고, 선교는 예배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라는 말처럼, 지금은 선교 기회로 팬데믹 기간을 선용해야 한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 사랑의 극치는 예배로 표현된다면, 이웃 사랑의 최고치는 선교의 실천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고대교회에 전염병이 세상을 휩쓸었을 때 기독교인들은 가족들도 외면했던 시신들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줌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다.

기독교 선교역사학자인 허버트 케인에 의하면 "무기는 없어도 진리를 가지고, 깃발은 없어도 사랑을 가지고 단순한 마음과 친근한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산과 바다를 건너 제국 사방으로 다니면서 어디에 가든지 자기들이 발견한 새로운 신앙을 가족과 친지와 이웃에게 맘껏 전달했다"고 한다. 진리와 사랑! 이것은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고, 선교의 실천 양식이다.



#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성찰, 회개하고 새로운 대안 모색

슬라보예 지젝은 공포와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찬 코로나바이러스에 찌든 사람들 사이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난날의 이기적, 자기중심적 가치와 태도를 극복하는 자기 성찰과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본다.

지젝은 이탈리아 역사가인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것이 그 나라에 소속됨을 나타내는 진짜 증표일 수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땅히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양심의 소리와 수치심을 제기한다.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발생한 대중적 분노가 오히려 공정하고 정의로운 대안 사회를 이루는 계기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한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고립과 강요된 침묵의 시국에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네타냐후와 트럼프가 자신들을 위해 행한 정치에 대해 부끄러워할 용기를 낼지도 모른다. 당연히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게 아니라,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치계가 하는 짓, 유대주의 자체의 가장 귀중한 유산에 행하는 짓들에 수치심을 느낀다는 뜻이다. … 중국에서 정말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자신은 과잉보호하면서 감염병의 위험을 드러내놓고 깎아내렸던 인간들이다. 그자들은 마치 체르노빌 사태를 놓고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으면서도 자신들의 가족은 재빨리 대피시킨 옛 소비에트 공무원들, 혹은 지구 온난화를 공공연하게 부정하면서도 이미 뉴질랜드에 저택을 구입했거나 로키산맥에 피난처를 짓고 있는 고위급 관리와 같다. 어쩌면 이런 이중적 잣대를 가진 존재들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이 위기의 뜻하지 않은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김영동 교수 / 장신대 선교학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