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

"숨을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 (dum spiro spero)

[ 알기쉽게풀어쓴교리 ] 10. 희망의 교회론 -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망 공동체로서의 교회(1)

김도훈 교수
2022년 05월 18일(수) 06:16
절망은 죄인가

희망을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어김없이 절망을 이야기 한다. 마치 희망의 반대는 절망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질문이 생긴다. 혹시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희망의 반대는 절망이 아니라 죄가 아닐까 하는 질문이다. 과연 "절망은 죄인가"(an desperatio sit peccatum)? 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 절망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으며 좌절하고 실망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사소한 것에 실망하고 이루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고 자신의 나약함에 실망한다. 삶이 허무하여 절망하고 막혀 있는 벽 앞에서 절망하고, 나락의 밑바닥에서 절망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절망이 반드시 절망을 낳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절망의 역설을 말한다. 시인의 절망은 시를 낳고, 화가의 절망은 명화를 남기고, 음악가의 절망은 명곡을 창작한다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실망은 무엇을 낳는가.

분명한 것은 절망이기 때문에 절망이 아니며, 희망없음 때문에 절망이 아니며, 위기이기 때문에 절망인 것은 아니다. 절망은 결코 절망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절망을 절망으로 보기 때문에 절망은 찾아온다. 절망을 절대화하고 절망밖에 없다고 절망하기 때문에 절망은 온다. 모든 절망이 죄는 아니다. 절망이 죄인 것은 절망이 절망으로 끝날 때다. 그래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과 능력을 믿지 못할 때이다. 몰트만의 말대로, 절망이 "약속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희망의 인내를 거역"(30)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죄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교회의 위기라고 부르짖는 시대, 교회에 소망이 없다고 말하는 시대,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한다.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 "그래도 소망은 교회에 있다"라고. 교회에 냉소적이고 교회에 절망하는 시대, 교회의 위기라고 부르짖는 시대에 필요한 또 하나의 교회론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망 공동체로 바라보는 희망의 교회론이다. 여기서 희망의 교회론을 구체적으로 말하기 전에 희망에 대한 짧은 나의 단상을 끄집어내 보려 한다.

필자의 신학적 관심은 오래전부터 희망과 용서와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었다. 그때 던졌던 물음은 지금도 나의 기억에 생생하다. 왜 기독교신학은 희망을 말하지 않는가 하고 반문하던 몰트만의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차대전의 비참한 대학살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겠는가"하고 절망하였다. 몰트만은 반문했다. "만약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우슈비츠 이후에 도대체 우리가 무엇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몰트만의 절규는 나에게 한 줄기 도전이었고 나의 희망의 신학의 자극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말하면서 동시에 절망을 말하는가. 왜 교회는 하나님을 전하면서 희망과 용기보다 현실의 위기와 불안과 절망을 더 많이 말하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고 약속의 하나님이 아닌가.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희망의 종교 아닌가.

어느 시인은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백나무도 삶의 의지만 충만하다면 꽃을 피울 수 있다. 진달래가 깎아지른 듯한 언덕배기에서 토사와 싸우며 무던히 버티려는 혼만 있다면 뿌리를 내릴 수 있고 만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은 어떤 조건과 환경에도 버팅기는 기력이 있기에 희망의 꽃봉오리를 한아름 안고 무장무장 다가온다"고 쓴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삶을 향한 의지만 있다면, 앞이 보이지 않아도 버틸 영혼만 있다면, 오히려 절망이 씨앗이 되어 반드시 희망을 그 결실로 보게 된다고 위로한다. 절망의 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러니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우리의 호흡이 존재하는 한 희망해야 한다 (dum spiramus sperare debemus).

김도훈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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