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의 시대에 교회는

탈진실의 시대에 교회는

[ 주간논단 ]

최효녀 장로
2022년 03월 22일(화) 08:15
오래 전에 제목이 매우 특이해서 본 영화가 있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이다. 영화의 내용은 잔인한 살인 청부업자가 마약 거래상의 엄청난 돈을 우연히 획득한 사람의 뒤를 추격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는 줄거리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궁금증을 자아낸 것은 영화의 제목이었다.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추격'이나 '광기'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인'이라는 단어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 제목으로 사용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표현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에 나오는 문구라고 한다.

그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사람이나 물고기나 짐승이나 새들이나 모두 그저 배고 태어나고 죽는 저 일에 몰두해 있지 않니? 그저 본능 아니 관능의 음악에 취해 있을 뿐 세월 속에 변치 않는 지성의 기념비 같은 것에는 그 누구도 관심조차 없지 않니? 그러니 이곳은 나와 같은 노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저들의 세상이 아니겠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노인'이란 '오래된 지혜를 가진 현명한 생각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노인이 없다는 것은 바로 지혜와 지성이 상실된 것, 혹은 중요한 가치나 진리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진리가 상실될 때, 세상은 관능에 따라 혹은 자기 이익에 따라 흘러감으로 혼돈이 발생한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들어 등장한 단어 중 하나가 '포스트-트루스' (Post-Truth)라는 뼈아픈 단어다. 포스트-트루스의 '포스트'는 '~이후'를 뜻하지 않고, '진실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현 시대가 포스트-트루스의 시대임을 확증하는 것은 '팩트 체크', '가짜 뉴스'라는 단어이다. '팩트 체크'가 난무하는 것은 진실 혹은 진리가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이익만 되면, 거짓말 혹은 약간의 왜곡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기독교가 제공할 진리는 무엇일까?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자선을 베푸는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일까? 다양한 종교적 행위들이 수없이 실행되어도 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으로써 이 땅에 인간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 말씀만 전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십자가만을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말의 가르침이 아니라, 이 땅의 아픈 곳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성 프란시스코는 "항상 복음을 전하라. 하지만 필요할 때만 말을 사용하라"고 말했다. 오늘날 기독교를 바라볼 때 이 구호가 왜 이리 뼈저리게 다가오는 것일까? 말의 홍수 속에서 진실이 가려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그 행동으로 증명된다. 교회생활과 전도, 선교활동에 있어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말과 돈으로만 전달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피 묻은 절절한 사랑으로 전달되고 있는가? 사순절을 지나면서 그리스도의 삶의 흔적들을 반추하며 그 발자국을 되새겨 본다.



최효녀 장로 /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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