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지

[ 목양칼럼 ]

서규석 목사
2022년 03월 02일(수) 08:04
30여 년 전, 섬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일이다.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그 당시 시무장로 중에 S장로님이라고 계셨다. 비교적 말이 없고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며 가정에도 충실한 모범적인 장로이셨다. 근심도 걱정도 잘 하지 않는 낙천적인 성품을 가진 그 장로님에게 매년 찾아오는 명절은 언제나 아쉬움과 서운함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사연인 즉, 그 내막은 이렇다.

아들만 다섯을 둔 장로님 위로 목회하는 형님이 계셨는데 그 형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하여 첫 아들을 낳자마자 바로 형님에게 드린 바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 그 큰 아들이 장성하여 명절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은 아버지께 인사 드리러 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 집에 아버지께 인사하러 오는 것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 장로님 집에 찾아온 아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질 않는다는 사실이다.

"작은 아버지, 그 동안 평안하셨는지요?" 핏덩이 시절, 형님께 드려진 아들이 다 커서 아버지인 그분께 찾아와서 하는 인사말이다. 아버지인 그는 조카가 되어버린 아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저 녀석이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라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이 서운한 감정이 명절 내내 가득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아버지'라는 석자 이름 하나가 그렇게 하기 어렵단 말인가? 회중들을 변화시키는 감동적인 명설교를 하라는 것도 아니며 유창한 언변으로 웅변하라는 것도 아니다. 물론 청중들을 뒤 흔드는 세기의 연설을 하라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냥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버지라고 한번만 부르면 될 터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인간적으로 보면 실로 아쉽고 서운하기 짝이 없다.

당시 필자는 그 장로님께 이렇게 위로의 말로 권고하곤 했다. "장로님, 그 아들, 장로님 아들 아닙니다. 이미 사랑으로 형님께 내어드린 자식이잖아요. 이젠 조카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대해주세요."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담임목사인 내 말조차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서운해도 어쩔 수 없고 아쉬워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미 오래전에 그 아름답고 희생적인 마음으로 내어드린 자식이 아니던가?

아버지가 아버지 되지 못하고 작은 아버지가 되어버렸을 때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 아들로 인하여 누군가가 기뻐하며 뛰었을 것이고 그 아들 때문에 그 어느 한 가정엔 진정한 행복이 찾아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자식 앞에 선 그 아버지는 더 이상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아버지 됨을 포기해야 했고 아버지로서의 위치를 다 내려놓아야 했다. 눈물도 서러움도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S장로님은 소망의 항구에 다다를 때까지 거친 인생의 파도를 헤치고 거대한 삶의 폭풍과 맞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대가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내어주셨다. 아무 조건도 없이, 그 어떤 단서도 달지 않은 채 인류를 사랑하시는 마음 그 하나로 선뜻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모든 걸 기쁨으로 받아들이셨고 하늘 은총으로 그 아픔과 아쉬움을 모두 덮으셨다. 언제나 내 마음속에 맴도는 그리운 이름 하나, 아버지! 부르고 또 부르고 싶은 이름이여,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놓은 그 이름에 내 삶의 의미가 서려 있다.



서규석 목사 / 부안 동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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