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자본을 이어가는 사람이 되길

이야기 자본을 이어가는 사람이 되길

[ 주간논단 ]

최효녀 장로
2022년 01월 18일(화) 08:10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은 우주에도, 해와 별과 달에도, 지구에도, 식물에도, 동물에도 새겨져 있다. 그러나 창조의 이야기를 하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그러기에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구분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야기의 대상과, 그 대상과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와, 이야기를 듣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를 살아 숨 쉬게 하기 위해서는 전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 자체의 생명력 혹은 매력이 필요하다. 매력을 갖기 위해서 포장이나 과장 혹은 거짓이 있을 때, 이야기는 신뢰성을 상실하고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다. 이런 매력을 현대 사회에서는 '이야기 자본'이라고 한다.

기독교 안에도 이야기 자본이 있다. 그것도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 자본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한다.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다. 이 기독교의 이야기는 전달자가 소설을 읽듯이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가 되도록 초청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할 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모든 민족을 제자 삼을 것을 부탁한다(마 28:19~20). 이런 예수님의 이야기에 동참한 것이 바로 여전도회의 시작이다.

조선 말기 여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없었다. 단지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엄마에 지나지 않았다. 여인이라는 정체성도 없이 그냥 한 가정 안에 딸로 아내로, 엄마로만 존재했다. 복음은 이런 여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찾아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동안 정체성도 없었던 여인들에게 한 사회의 구성원이고 한 사람의 삶이 있는 주체적인 존재임을 알려주었다. 그러기에 고(故) 김마리아 선생과 같이 3.1 혁명 독립선언문의 기초가 된 2.8 독립선언문을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고 들어올 수 있는 주체적인 여성을 탄생하게 했다. 이는 복음을 만나고 복음의 이야기를 귀로만 듣는 자가 아닌 복음의 이야기에 동참하는 자로 자신을 투여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현재 여전도회관도 교회여성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다. 이 속엔 쌀 한 톨을 아끼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아껴가며 신앙인으로 교육받고자 하는 교회여성들의 동참이 있었다. 이들의 동참은 여전도회관이 아닌 건물을 통한 이야기로 살아 숨 쉬고 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도 자신들을 구원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구원의 이야기에 동참했고, 그 동참은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까지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참여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이 모여서 지금의 여전도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복음은 전설로 박제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참가자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오늘의 기독교는 앉아 듣기만 하는 기독교로 전락한지 오래다. 이야기의 동참자가 아닌, TV를 보는 시청자의 자리에 있는 경우가 많다.

2022년 기독교인들이 그냥 귀와 눈 그리고 입만 즐거운 기독교인이 아니라 주님의 이야기 속에 참여하여 이야기 자본을 만드는 자로 한 해를 살아가길 바라며, 이야기의 흔적을 간직한 피조물이 아니라 이야기의 참여자이자 전달자이며, 복음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자가 되길 소망한다. 그로 인해서 제자라는 이름이 아닌 제자가 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최효녀 장로 /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신성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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