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라는 직업

시인이라는 직업

[ 시인의눈으로본세상 ]

이재훈 시인
2021년 06월 09일(수) 10:00
두 명의 시인이 저물녘 강변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한 시인이 물었다. 저기 저무는 황혼의 물결 좀 봐. 아름답지 않아? 마음이 금빛으로 물드는 거 같아.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시인이 천정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야, 맘 편히 쉬는데 자꾸 일 얘기 하지 마. 물론 다소 썰렁한 개그다. 시인은 늘 아름다운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이 재밌는 얘기를 만들었다.

아무래도 글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 쓰는 동네 사람들이다. 간혹 문인이 아닌 사람들을 만나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가 있다. 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시인을 처음 본다는 것이다. 신기한 듯 살피면서 나도 왕년에 시를 좋아했는데 라며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누구나 사춘기 시절 노트에 시를 옮겨 적고 감상에 빠지는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시를 좋아하고 읽고 있다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시는 늘 과거에 좋아했던 추억의 장르인 것이다.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서 이런저런 생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 직업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깜짝 놀란다. 시인도 직장을 다니세요? 집에서 시만 쓰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요. 시인도 똑같이 일하고 밥 먹고 똥 싸요. 일 안하면 굶어요. 이슬만 먹고 살지 않아요. 시를 써서는 못 먹고 살아요. 시는 돈이 안돼요. 대부분의 시인들은 직업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시가 좋아요. 시가 제 삶이에요. 뭐 이런 얘기를 구구절절 얘기한다. 그러면 뭔가 구차해진 느낌이 든다. 자꾸 변명하는 것만 같고 자꾸 외로운 마음이 든다.

어쩌면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시인의 직업적 소명 아닐까. 평안하고 행복한 마음이었다가 쓸쓸한 마음이 들어올 때 시는 탄생한다. 그러면 세상은 온통 서럽고 외롭고 아픈 것만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 아프고 슬프게 보인다. 그 마음이 시를 만든다.

박준 시인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폐가 아픈 일도/이제 자랑이 되지 않"고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자랑이 되지 않"지만 "하지만 작은 눈에서/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고 했다.(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시인은 슬픔 예찬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수경 시인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고 했다. 고추밭에 누워있는 고추모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아랫도리 서로 묶으며/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고 말한다. 시인은 누추하고 외롭고 실패한 자리를 비추는 슬픔과 결핍의 왕이다.

그렇다고 시인이 늘 우울한 건 아니다. 일상인과 똑같이 밥 먹고, 일하고, 영화 보고, 뉴스 보고, 프로야구를 보고 간혹 여행도 간다. 그러다 문득 몇 십분 아주 느린 시간을 산다. 시의 시간이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일반적인 책을 읽듯 읽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낭독하듯 한 글자 한 문장 또박또박 읊조리며 읽는다. 우리는 늘 빠르게 걷고 빠르게 생각하고 빠르게 대답하며 산다. 이런 속도에서 잠시 정지 버튼을 누르고 느린 속도와 침묵의 시간을 몇 분간만이라도 보낸다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인들은 그런 시간과 마음을 받아 적는 것뿐이다.

시를 생각하고 시를 쓰는 누구나 시인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시를 쓰면 누구나 시인이지만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은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 시인은 그냥 태어나는 게 아니다. 김수영의 말처럼 시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래야 좋은 시가 겨우 태어난다. 시인이라는 또 다른 직업을 가진 숙명으로 오늘도 느린 시간을 살아간다.





이재훈 시인/건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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