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난 상처를 다시 치유할 흰 도화지

덧난 상처를 다시 치유할 흰 도화지

[ 기독교문학읽기 ] 19 이경신 작가의 '못다 핀 꽃'

김수중 교수
2020년 06월 10일(수) 10:00
역사의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모질게 덧나 큰 시련이 왔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와 그 피해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사이에 놓인 골이 그토록 깊을 줄이야. 30년을 함께 아픔 나눈 이들이 온 국민 앞에 펼쳐놓은 불신의 손가락질을 지켜보며 우리의 마음은 미어지다 못해 하얗게 타버리는 듯하다. 우리 국민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 가해자 일본의 비인간적 행위에 분노했고, 피해자 할머니들을 내 가족처럼 위로하기 원했으며, 정의를 세우기 위해 일하는 이들이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1992년 1월부터 수요일 정오마다 단 한 번도 거름 없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이루어진 수요집회는 성노예제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법적 배상, 역사 왜곡 바로잡기를 요구하며 온 세계인들의 양심을 일깨웠다. 할머니들은 이 집회의 상징적 인물이었고 정의연은 주관 단체였다. 그러나 지난 5월, 할머니 한 분이 기부금 모금 및 사용의 불투명성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열자 세상은 온통 뜨거워졌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의연 전 이사장은 한순간에 비리 의혹의 대상이 되었으며 할머니에게 배신자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는 할머니와 정의연 사이에 있었던 기금 사용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아는 것은 이로 인하여 일본이 저지른 만행과 역사 왜곡이라는 본질이 가려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 아무도 이 성노예제 피해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때 홀로 고통을 삭이던 할머니, 순수한 양심으로 사회 활동에 몸 바치려 작정한 정의연의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얀 도화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이 문제에 다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경신 저자는 1993년부터 5년 동안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미술 수업을 진행하며 마음을 나누고 심리적 회복을 위해 노력한 화가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저자는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던 네 분의 할머니들을 기리며 그 치욕의 삶을 위로하고 치유할 글과 그림을 헌정했다. 이 책의 제목이 '못다 핀 꽃'이다. 처음에 할머니들은 하얀 도화지 앞에 마주 앉기를 두려워했다. 꽁꽁 묻어두었던 수치스러운 감정이 되살아날 때면 괴팍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저자인 미술 선생도 이 미술 치료가 할머니들의 상처를 어설프게 헤집는 결과가 될까 봐 무척 겁을 냈었다.

그러나 네 분 할머니들은 2년 만에 기초 데생에서 발전하여 자신의 내면을 향해 다가가는 심상 표현을 시도하게 되었다. 참혹했던 과거를 홀로 버텨내던 힘을 드디어 흰 캔버스에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할머니들의 상처는 그림 속에서 새로운 염원이 되어 빛나 올랐다. 한 할머니는 어디선가 수집한 목련 자수를 자신의 그림에 결합했다. 봉오리가 터지기 전의 그 모습이 슬픈 소녀의 과거가 되어 '못다 핀 꽃'으로, 아니 '조금 늦게 핀 꽃'으로 되살아났다.

이경신 저자는 할머니들의 흰 도화지 이야기를 2018년, 세상에 내놓았다. 2020년 오늘 이런 일이 있을 줄 전혀 모르는 채로 말이다. 미술 수업을 받은 네 할머니 가운데 지금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할머니가 바로 정의연의 운영 문제를 제기한 분이다. 지금 저자의 마음은 덧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모두가 처음 흰 도화지 앞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지 않을까! 우리도 지금 이 책을 함께 읽으며 처절하게 외롭던 할머니들의 심정으로, 또 가해자 일본의 사죄를 위해 나섰던 정의연이 초심을 회복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제 민족의 미래라는 하얀 도화지에 새로운 역사를 그리고 싶다. 덧난 상처를 속히 치유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구현하려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을 멈춰서는 안 된다.



김수중 교수/조선대 명예·빛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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