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어서, 차별 없는 음악으로

어디에나 있어서, 차별 없는 음악으로

[ 최은의 영화보기 ] <디베르티멘토>(2022)

최은 평론가
2024년 09월 27일(금) 13:54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에 빠지는 대목이라면서, 왜 이렇게 무거운 코드가 많이 나오는 거야?"

프로코피예프의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기사들의 춤'을 피아노로 연주하던 소년이 묻자, 소년의 연주를 지휘하던 소녀가 답했다.

"가면무도회였지만 줄리엣이 춤을 추는 상대가 로미오인 것을 가족들이 눈치채 버렸어. 브라스의 연주는 로미오의 가슴이 뛰는 소리야. 빠밤! 빠밤!"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면 어떨까? 마리-카스티유 망시옹-샤르의 영화 '디베르티멘토'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인 열일곱 살 소녀 자히아 지우아니(올라야 아맘라)는 후에 유리천장을 뚫고 전 세계에서 6%, 프랑스에서는 4% 밖에 안 된다는 여성지휘자가 되어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망시옹-샤르는 누구나 쉽고 친근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클래식 음악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자히아 지우아니의 예술철학과 꿈이 시작되는 지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출발점에 자히아가 쌍둥이 자매 페투마(리나 엘 아라비)와 함께 만든 '디베르티멘토'라는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디베르티멘토는 18세기 유행했던 일종의 '여흥음악'으로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가벼운 형식으로 짜인 기악곡을 의미한다.

자히아와 페투마가 처음부터 오케스트라를 직접 결성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비올라를 연주하는 자히아와 첼리스트 페투마는 알제리계 이주민 출신으로 파리 외곽의 스탱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파리의 명문 라신고등학교 졸업반에 편입한다. 클래식 기타와 비올라로 음악에 입문했고 지휘자가 되고 싶은 자히아는 라신의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면서 스탱의 어린 학생들에게 비올라를 가르치고 동시에 슈베르트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있다.

하지만 파리 외곽의 노동계급 출신이면서 이방인이고 '어린 여자'라는 삼중고를 안고 자히아가 뛰어든 세상은 그의 꿈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졸업연주회 지휘를 맡게 되었지만 파리의 상류층 친구들은 자히아의 재능을 시기하거나 무시하며 "여자는 지휘 못 해"라고 대놓고 쏘아붙이기 일쑤다. 심지어 자히아와 라이벌인 랑베르는 아버지의 지위를 이용해 슈베르트 음악원에서 예정되어 있던 자히아의 지휘 기회를 가로채버렸다.

절망하는 자히아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가족이었다. 그에게는 클래식을 사랑하는 부모와 자신도 부당한 대우를 견뎌내며 자히아 곁에서 최고의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2분 터울 쌍둥이 여동생 페투마가 있었다. 랑베르에게 빼앗긴 오케스트라는 애초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을 거라며, "네 오케스트라가 필요해"라고 페투마는 말했다. "널 닮은, 너만의 오케스트라."

다른 도움도 있었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세르주 첼리비다케(닐스 아르스트럽)는 음악에 대한 자발성을 칭찬하며 자히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삶이 곧 음악이라고 첼리비다케는 말했다. 영화 '디베르티멘토'에서 이 말은 추상적인 표현이 결코 아니다. 여기에 음악은 멜로디라기보다는 리듬이고 박자라고 했던 첼리비다케의 말을 덧붙여 생각해보자면. 우리 삶, 즉 일상이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자히아는 도처에서 음악을 듣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예컨대 밤늦게 고가도로를 지나 귀가하는 차량의 행렬이 지닌 장단의 박자와 불빛의 흐름이 지닌 리듬, 엄마가 휘핑크림을 만드느라 거품기를 휘젓는 손목의 움직임과 그릇과 거품기가 만나 생겨난 소리들, 수영장에서 찰랑거리는 물, 전철이 빠르게 달리며 내는 소리에서 자히아는 규칙적인 흐름을 읽어내고 손가락과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일상을 견디고 꿈을 꾼다.

'자히아를 닮은' 오케스트라는 무엇이었을까? 자히아와 페투마가 만든 '디베르티멘토' 오케스트라에는 스탱의 학교 친구들과 파리의 명문가 친구들, 스탱 음악원의 어린 학생들, 복지센터의 어린이들과 장애인, 재소자의 아들과 시장의 아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주변과 중심을 모두 한 데 어울러 차별 없는 다양성이 핵심이다.

도입부에서 일곱 살의 자히아가 잠에서 깨어 첼리비다케가 지휘하는 라벨의 '볼레로'에 매료되었던 밤, 자신도 모르게 박자에 맞춰 손목을 까딱이던 그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 스탱의 공터에서 연주되는 디베르티멘토의 '볼레로' 장면과 성공적으로 만난다. 자신을 닮은 오케스트라 앞에서 환희에 찬 연주를 이어가는 자히아의 몸동작을 뒤쪽에서 작은 흑인 소녀가 열심히 따라하고 있다. 그 아이도 언젠가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만날 수 있을까. 예술의 영속성과 음악이 지닌 섭리를 담아낸 영화의 영리함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음악은, 삶은 지속되고 희망은 도처에 박자와 리듬으로 흔적을 남긴다.

사방에 귀를 쫑긋해 볼 만한 가을이다. 뜻밖에, 세상 모든 '돌들의 찬양(눅 19:40)'이 들려온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없다.



최은 영화평론가·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부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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