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하기

아무것도 안 하기

[ 목양칼럼 ]

안홍택 목사
2019년 09월 27일(금) 00:00
교회에 새로 등록한 성도님의 말이다. "2년 정도 교회 생활을 했는데, 아직도 낯설다"고 말한다. 그래서 왜 익숙하지 않냐고 물으니 "교회가 성경공부도 하면서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회로 모이는데 왜 아무것도 안한다고 생각할까? 신앙을 훈련할 수 있나? 30년 동안 교회의 공식적인 모임은 주일 오전, 저녁 그리고 수요일, 구역, 새벽기도가 전부이다. 우리 교회는 부흥회, 제자훈련, 전도폭발, 셀 등 각 종 세미나를 하지 않는다. 가능한 조직하지 않고, 인위적인 모임을 갖지 않기 위해 무언가 하려는 마음을 꾹 누르고 지금까지 왔다. 교회가 하는 일은 이웃과 나누며, 세상의 고통 받는 자들에게 다가가려고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교회는 왜 무언가 주어야 하고, 베풀어야 하나?

작은 음악회가 교회 밤나무 아래에서 열렸다. 근데 갑자기 가을비가 내려 무대 위의 악기들이 젖을 것 같아 전전긍긍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학교에서 텐트 두 동을 빌려 와서 무대와 객석에 치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다. 그래서 마을에 무엇을 베풀거나 줄 수가 없다. 오히려 거꾸로 마을이 교회에 베풀고 준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것인가? 주는 것인가?

어떻게 신앙을 훈련할 수 있나. 예배당은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는 곳이다. 30년 전 부목사 시절 당시 제자훈련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던 때, 예배와 기도 구역장 공과교육 정도만 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교회는 단지 주께서 주의 뜻을 드러내시면, 겸손히 자기를 비우고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집단적으로 훈련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한 훈련인가? 훈련이 된다는 기준은 어디에 있나? 숫자가 늘어나니 제자훈련을 잘 해서, 경배와 찬양을 통해서 성장했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착각은 아닌가? 속은 것은 아닐까? 군사독재 시대의 교회가 경제 부흥에 부응하여 형, 아우하며 함께 춤추었던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잎만 무성하니 열매가 없다.

훈련이 안 돼서가 아니라 마음에 불쌍히 여김과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간에 맞춰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미문 곁의 걷지 못하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은 무엇을 주려나 하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눈여겨' 보았다. 불쌍히 바라 본 것이다. 주님의 마음이다. 두 사도는 눈에 보이는 한 푼을 준 것이 아니라, 전생애의 전환을 선물한다. 이 기적은 특별한 집회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기도 시간에 참여하면서 일어난 기적이다. 하나님은 특별하지 않다. 일상적이시다. 아니 매일 매일이 특별한데 어떻게 더 특별할 수 있겠나.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 사모함을 훈련할 수 있나?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나?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이 아닌가? 바라봄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따라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 사모함과 십자가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불쌍히 여김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안홍택 목사/고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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