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공감 부활 평화

기억 공감 부활 평화

[ 목양칼럼 ]

안홍택 목사
2019년 09월 20일(금) 00:00
성찬은 예수의 죽음을 기억한다. 왜 부활이 아닌 죽음을 기억할까? 5년 전 교회 건물 한 편을 수리하다가 점심 때에 근처 밥집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TV에서 배가 침몰하는 뉴스를 실시간 영상으로 보도했다. 그때만 해도 배는 구조할 만한 기울기어서 거기서 그대로 승객들을 배에서 구조하면 되겠다는 편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구조는 없었고, 선장과 승무원들이 해경에 의해 구조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멘붕이 왔다. 모든 국민이, 아니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승객을 구조하지 않는 현장을 보았다. 자본과 국가 폭력과 언론과 학계, 법조계, 그리고 교회까지 합작하여 사실을 호도한, 한 나라의 모순이 집약된 사건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세월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보기 시작했다. 이전과 이후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 달이 조금 지나 예은 아빠 유경근 씨는 "한 달 뒤에도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 달라며 잊혀지는 것이 두려우니 공감해 달라고 했다. '공감'이라는 말이 기억에 생생하다. 기독교는 기억하는 종교다. 성찬을 통해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찢긴 살과 흘리신 피를 기억한다. 아마도 죽음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로 생애를 마감하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베드로는 고기잡이로 돌아갔는데, 그 곳에 예수님이 찾아왔다. 스승의 죽음을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손과 발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보여주며, 그 죽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평화!'라고 한다. 그 어원에는 '공감하다' '함께하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두려워 낙심하여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자책감에 사로잡혔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만지며, 서로 공감하며 부활이 모두에게 찾아오기 시작한다.

몇 년 전 전쟁 중 자행한 만행을 적극적으로 사죄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아베 총리에게 역사 인식에 대한 언급을 하여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유대인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철저하게 색출해 지금도 이스라엘의 법정에 세운다. 독일은 운동장에서 독일국기를 흔들지 못하게 한다. 자신들의 전체주의적 성향이 어떤 우를 범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미리 차단하기 위한 조처이다. 그런 것을 보면 독일은 국가 전체가 성찬의식을 일상 속에서 베푸는 나라가 아닌가. 끊임없이 반복하여 홀로코스트를 통해 죽은 600만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나라다. 기독교 국가 중 예배당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일상 속에서 살아있는 성찬을 나누는 나라는 독일 뿐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 6절을 보면 하늘 영광 보좌에 어린양이 자리하고 있는데 "죽임당한 것 같다"고 한다. 왜 영광의 자리에 '죽음'도 아니고 '죽임'이 기억될까? 아! 인류 역사의 폭력으로 당한 죽음들을 생각해보니, 하나님은 창세기의 아벨의 죽음에서 계시록의 죽음까지 죽임을 기억하고 있다. 지구는 얼마나 많은 죽임으로 고통받았는가? 그렇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임 당함은 모든 죽음을 위로하는 죽임 당함이다. 십자가를 통해, 성찬을 통해 우리는 죽임과 십자가와 부활과 궁극에 평화를 기억한다. 그렇게 4·16세월호를 기억한다. 평화!

안홍택 목사/고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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