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주일특집2>마틴 루터 종교개혁 3대 모토

<종교개혁주일특집2>마틴 루터 종교개혁 3대 모토

[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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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6일(목) 17:57

500년 전 루터가 강조한 종교개혁 3대 모토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개인의 신앙에 적용할 수 있는 개혁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편집자주>


오/직/성/경-성도의 믿음과 삶의 기준은 '성경' 뿐

올해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이다. 주지하다시피 종교개혁의 3대 모토는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criptura)이다.

이것의 밑바탕에는 '말씀의 회복', 즉 교회의 전통이나 인간의 권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깔려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000여 년 동안 지속된 중세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관행을 말씀으로 과감하게 도려낸 칼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오직'이란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오직'이란 말은 그동안 인간이 겹겹이 쌓아올린 바벨의 뿌리를 베어낸 칼의 언어이다. 성도가 지녀야 할 믿음과 삶의 최고 권위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중세 가톨릭교회는 성경임을 인정하긴 하지만 교회의 전통과 신조, 그리고 교황의 가르침도 그와 유사한 권위를 가진다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루터는 "무슨 소리냐? 성도의 믿음과 삶의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오직 성경!'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타락한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또한 어둠을 밝힌 빛이 언젠가 또 다시 어둠에 자리를 내어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번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는 언제나 초심을 잃어버리고 타락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때 마다 날선 검과 같이 예리한 말씀 앞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을 기념한다는 말은 그저 거창한 행사를 치르거나, 그들이 서 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의 진정한 기념은 그들이 시작은 했으나 아직 도달하지 못했던 그 일을 계속 해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떤가? 중세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에 인간적인 욕망을 덕지덕지 붙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음을 말하고 믿음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 복음+알파, 믿음+알파를 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알파는 돈일 수도, 권력일 수도, 성공일 수도 있다.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여전히 예수 믿으면 돈 잘 벌고, 출세하고, 성공한다는 번영신학과 성장주의가 한국교회를 지배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 시대와 너무나 닮은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귀담아 듣고 회복해야 할 메시지도 '오직 성경'이다. '오직'이라는 칼날이 모든 인간적인 정욕을 과감하게 베어버릴 때에만 한국 교회는 희망이 있다. 결국 오늘날의 한국교회 역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곧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요,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당시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 가운데 르네상스 인문주의 운동을 언급할 수 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모두 '아드 폰테스'(Ad Fontes), 즉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그들 모두 부패한 중세 이전으로, 즉 고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 일치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로 돌아간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따라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순수했던 처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모든 신앙과 삶을 성경말씀 앞에 비추어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의 전통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내 신념, 내 전통이 전부가 아니며, 내 방식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생각, 내 주장의 한 자리에 늘 "나도 틀릴 수 있다"라는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내가 철석 같이 믿어 온 전통과 신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칠 때는 과감하게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마르틴 루터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 교훈이다.

둘째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성경이 요구하는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을 읽고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중세시대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경을 하나 이상씩 소유하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쉽게 읽을 수 있다. 중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우리가 성경은 가지고 있되 그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성경을 소유하는데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며, 성경 자체를 숭배하라는 말도 아니다. 성경의 진정한 가치는 그 말씀대로 살아낼 때야 비로소 입증된다. 성경의 메뉴얼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외쳐도 그것이 삶을 통해 입증되지 않는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성경의 가치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정치적으로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개혁될 수 있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교회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면에 종교개혁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개혁했을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기본으로, 즉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처럼 우리도 성경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는 철저한 회개와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이렇게 단순한 개혁이다. 참된 개혁은 '나'로부터, '내 교회'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개혁을 수식하는 '500주년'이라는 숫자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승호 교수/영남신대


오/직/은/혜-죄인이지만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Sola Gratia'라는 말은 'Sola'를 가지고 있는 종교개혁의 3대 기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은혜'라는 말은 굳이 종교개혁 시대만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 모든 시대에 적용해도 되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독교 역사에서 은혜를 반대하는 자들로 정죄되었던 자들도 실상은 끊임없이 은혜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표자이고 대명사로 낙인찍힌 펠라기우스마저도!

그런데 기독교 역사 내내 모두가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은혜라는 말의 이해가 하나가 아니고, 오히려 다양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은혜로 구원 얻을 자가 정해지는 것이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예정설을 인정하는 신앙인들 안에도 다양한 주장들이 충돌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신앙의 시작은 사람에게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예정하신다고 했다. 또한 어떤 사람의 미래의 행동을 미리 보시고 예정하시는 것이라고도 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주신 것이 은혜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노골적으로 인간의 공로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구원론도 있지만 이 모든 주장들은 한결같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귀결되었던 것이 기독교의 역사이다. '죄의 삯은 사망, 하나님의 은혜는 영생'(롬 6: 23)이라는 도식이 말해 주듯이 은혜는 삯의 반대 '거저'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오직'을 붙여서 주장한 종교개혁의 기치는 은혜 배타성을 뜻한다. '오직 은혜로'라는 말은 우리에게 온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라는 찬양에 앞서서 구원의 수단으로서는 은혜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이 기웃거릴 수 없도록 막아버리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은혜에 'Sola'가 붙게 되면서 구원과 관련한 지난 역사를 정리하게 되었고, 함께 종교개혁의 방향에 서 있는 자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드러나는 결과를 낳았다.

'Sola Gratia'라는 말의 의미는 마르틴 루터라는 인물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지나온 기독교의 역사를 충실히 받아들이며 그것을 개인적 신앙과 삶에 접목시켰다. "수도사가 자기의 헌신 행위로 가는 곳이 하늘나라라면 그곳에는 내가 가야 한다"고 할 만큼 하나님의 구원을 애타게 갈망하였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갈까?" 기독교 신앙인들이 잘 아는 미가 선지자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는 자세가 수도사 루터의 에어푸르트의 수도원에서의 모습이었다. 법학을 할 사람이 돌연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으로 가도록 만든 목적은 단 하나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을 위한 목적으로 입문한 수도원에서 루터가 했던 몸부림은 중세교회의 사랑과 은혜 보다는 율법적이고 복종 강요적인 교육의 산물이기도 하다. 동시에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다"는 유명론적 신학의 충실한 적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최선을 다했기에 그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미워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할 정도로 자신의 죄인 됨을 내어 놓고 통회의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십계명과 율법으로 짓눌린 인생에게 그것도 부족해서 '그 위에 영원히 군림하려고 하시렵니까'라며 하나님을 향해 항변도 하였다. 그러한 그가 '어느 한 날' 아니면 실제로는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홀로 의로움을 간직하고 군림하는 의가 아니라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면서 의로움을 드러내시는 의라는 것을 깨닫고 천국 문을 들어가는 것과 같은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통회 자복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에서 절망했던 그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단계에 이른 것이 바로 '오직 은혜로'의 내용이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심으로 얻는 평안을 위해서 했던 성경을 붙들고 씨름한 끝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때문에 오직 은혜를 주장하게 된 것은 동시에 성경 말씀의 살아있음을 확신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게 되었다(오직 성경!).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말은 옳지 않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정리하였다(의화가 아니라 칭의!).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깨달음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다(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 서는 것은 우리에게서 일어난 것이 '우리의 바깥에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일어난 것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깨달음의 결과 루터는 자신이 몸담았던 유명론 신학이 펠라기우스주의라고 정의내릴 수 있었고,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말하는 에라스무스와 겁 없이 절교하는 것도 불사하였다. 심지어 루터 자신처럼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의라는 해석을 했다는 것을 알고 존경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도 은혜 이해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한 루터에게 은혜라는 말로 포장을 하면서 하나님은 그 정성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주장을 펴면서 팔아대는 면죄부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황제와 제국의회 앞에서 개인적으로는 두려우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힘을 발휘한 것도 은혜 깨달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동일한 고백에 '오직'이라는 말을 붙이면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의 의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그 의미를 뚜렷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권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힘을 발휘한 것이 '오직 은혜'라는 고백에서 나온 힘이다.
종교개혁의 기치 'Sola Gratia'는 그 안에 기독교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신학적으로도 분명한 이해가 필요한 주제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보편적 고백을 종교개혁에서 다시금 중심주제로 만들면서 오늘날도 종교개혁을 대표하는 관념으로 만든 것은 신학자의 아카데믹한 활동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부인할 수 없는 한 신앙인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지 않으면 살 수 없어서 그것을 얻으려고 한계 상황에까지 간 신앙적 몸부림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오늘의 신앙을 돌아보려는 목적으로 이 기치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신학적 담론을 넘어서서 종교개혁의 유산을 이어받아 신앙 생활하는 신앙인인 나는 정말 오늘 여기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가를 진지하고 정직하게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지금까지의 나와 교회와 세상 앞에서 가지고 있던 신학적 이론과 신앙생활의 기준과 판단이 무의미해지고 신앙인이지만 여전히 죄인 된 자신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은혜로 말미암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이 불안할 정도로 부닥쳐오며 은혜라는 말의 의미가 선명해지며 다른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현상이 'Sola Gratia'의 참된 내용이다.

공성철/대전신대


오/직/믿/음-구원에 감사해 하나님 앞에서 거룩의 열매 맺어야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임으로써 시작된 종교개혁의 3대 모토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붙잡았던 원칙이었다. 그런데 루터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 이라는 것은 사유함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고뇌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몸부림에서 얻은 체험적인 신앙고백이었다.

루터는 1505년 7월 2일 부모님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함께 동행하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을 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이 죽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간 후에 수도원적인 삶에 따라 승단 규율인 엄격한 금식, 자기 성찰과 고해 등을 정확하게 수행하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히려 그의 내면에는 이러한 방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기는 구원받기에 충분한 봉사와 헌신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영적 훈련에 몰두할수록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우심에 두려움을 느낄 뿐 복음의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루터의 이와 같은 구원관에 대한 이해는 당시 중세 로마가톨릭이 교인들에게 잘못 가르친 구원관이었다. 중세 로마가톨릭은 믿음과 함께 선행을 통해서 구원에 필요한 공로를 쌓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 땅에서 선을 행하면 그것이 공적이 되고, 그 공적이 천국에 갈 정도로 충분히 쌓여야 연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만약에 믿는 자가 구원에 필요한 공적을 쌓지 못하면 연옥에 가서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공로로 인정해 주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루터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를 통한 복음의 재발견은 그가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는 '탑의 경험'(1515 / 1517)이라고 할 수 있는 비텐베르크 성당의 옥탑 방에서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로마서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즉,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의는 인간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의라는 것이다. 루터는 아담의 원죄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노예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의를 전혀 성취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성취하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으며 우리는 단지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결과에서 나오는 열매이자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고린도전 13장 2절에 대한 주석에서 "사랑을 성취하지 않는 신앙은 더 이상 신앙 자체가 아니라 무례하고 거만한 것이고 말씀도 형제도 다 무시하게 된다."고 했던 것이다. 즉, 사랑이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주장과 교만으로 왜곡된 신앙인 것이다.

사실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는 '오직 믿음'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믿음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수동적인 반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 확실한 보증으로 뭔가 보다 분명하고 적극적인 어떤 것을 추가하려고 했다. 그것이 행위(공로)와 이성(지식)이었다.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더하여 선한 행위를 통한 공적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이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믿음에 더하여 지식을 강조하면서 깨달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 바탕에 둔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구원관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 안에도 '오직 믿음'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행위와 지식을 추가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한 의나 지식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은혜를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주신 선물(엡 2:8)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다. 만약에 '오직 믿음으로' 외에 다른 그 무엇을 더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던 대속의 신앙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오주철 목사
언양영신교회, 계명대 외래초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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