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루터와 떨어지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나는 루터와 떨어지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 루터, 500년의 현장을 가다 <12> - 루터의 동역자 멜랑히톤

김태준 선교사
2017년 10월 10일(화) 13:44
   
▲ 비텐베르크 광장에 나란히 세워진 멜랑히톤(좌)과 루터(우) 동상.

종교개혁가 루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onㆍ사진). 그는 하이델베르크와 튀빙엔에서 공부한 학자이다. 1518년,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루터와 우정을 맺는다. 특별히 루터는 그에게 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웠고, 성경번역할 때 큰 도움을 받았고, 무엇보다 로마교황청과 논쟁이 있을 때면, 멜랑히톤이 그 사이를 중재하며 종교개혁의 신학입장을 펼쳤다. 그는 갈등과 투쟁을 싫어했지만,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중심에 놓여져서 루터를 도왔다. 루터보다 14살 아래였지만, 서로 진한 동료애를 서로 느꼈다.

1. 멜랑히톤의 고향: 브레텐(Bretten)
멜랑히톤의 할아버지는 상인으로 브레텐의 시장까지 역임한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멜랑히톤은 1497년 2월 16일, 브레텐에서 태어났으며 2남 3녀 중에 장남이었다. 당시 브레텐에는 라틴어학교가 있어서 필립은 잠깐 그 학교를 다녔다. 또한 가정교사가 필립에게 3년간 라틴어를 가르쳤다. 매우 엄격한 수업으로 당시 관행에 따라 암기가 위주였고, 틀렸을 때에는 회초리로 때렸다. 필립의 가정은 할아버지 집에서 생활했다. 그 건물은 1689년 프랑스군대와의 전쟁으로 무너졌는데, 그의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면서 1897년 착공하여 1903년 완공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은 중요한 1만권의 장서가 소장된 도서관을 갖춘 기념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사진1). 필립이 11살 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열흘 뒤 4년간의 투병 끝에 그의 아버지 역시 세상을 떠났다. 두 형제는 포츠하임(Pforzheim)에 있는 조숙모 로이힐린(Elisabeth Reuchlin) 댁에 보내졌는데,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문주의자 요한네스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의 여동생이었다. 무엇보다 고대 헬라어에 정통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필립은 그와 교류하면서 인문학적 교육을 받았고, 최고의 헬라어문법책을 저술한 헬라어교사 짐믈러(Georg Simler)를 통해 고전어를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로이힐린은 헬라어 외에도 히브리어과 라틴어에 정통한 학자였다.
로이힐린은 멜랑히톤에게 두 가지 큰 영향을 주었다. 첫째 멜랑히톤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본래 필립 멜랑히톤의 이름은 Phillip Schwarzterdt인데, 멜랑히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헬라어 문법책을 선물하였다. 속지에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 'Hanc Grammaticam graecam dono dedit Joannes Reuchlin phorcensis Legum Doctor philippo Melanchthoni Bretthamensi…'("이 헬라어 문법책을 포츠하임 법학박사 Johannes Reuchlin이 브레텐 출신 필립 멜랑히톤에게 주후 1509년 3월에 선물로 주노라") 필립이 처음으로 멜랑히톤이라고 불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뛰어난 학자가 학생의 학문적 자질을 인정할 때나 혹은 학계에 입문하는 자리에서 헬라어 이름이나 라틴어 이름을 붙여주는 관행이 있었다. '검은 땅'이라는 뜻의 Schwarzterdt 이름의 헬라식 이름이 멜랑히톤이다. 어린 조카손자의 학자적 자질을 인정해주는 순간이었고, 그 이후 필립은 멜랑히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둘째, 멜랑히톤은 로이힐린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비텐베르크대학을 세우고 1518년에 헬라어를 가르칠 교수를 찾았다.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헬라어 히브리어 학자인 로이힐린을 초청하였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많아서 힘들다고 거절하면서 대신 필립 멜랑히톤을 강력하게 추천하였고, 결국 멜랑히톤은 베텐베르크 대학의 헬라어 교수로 부임하였다.

2. 평생 사역지: 비텐베르크(Wittenberg)
1518년 8월 25일, 멜랑히톤이 비텐베르크에 살 때 그의 키는 1.5m로 작고 소년같이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실망했지만, 3일 뒤에 열린 취임연설에서 다들 놀라워하며 그의 강의에 열광하였다. 루터는 멜랑히톤과 급격히 가까워졌고, 서로에게 매력을 느꼈다. 특별히 그의 뛰어난 고전어 능력은 루터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멜랑히톤은 대학교수로서 뛰어난 실력을 입증했다. 그의 강의에는 400명이 넘는 수강생이 몰려들었다. 그 두 사람으로 인해 비텐베르크 대학은 전 독일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대학이 되었다(사진2). 멜랑히톤은 초라한 집에서 생활했는데, 그를 비텐베르크에 묶어두고자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재정지원을 하여 1536년 집을 새로 지었다. 그 건물이 오늘날 남아있는 멜랑히톤하우스이다(사진3).

3. 루터와 멜랑히톤
21살의 멜랑히톤이 비텐베르크에 왔을 때, 14살 많은 신학박사 루터는 금방 그와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사진4). 4개월만에 루터는 한 편지에 "우리의 필립 멜랑히톤은 놀라운 사람이며, 모든 부분에서 초인적이다. 나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의 친구가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골로새서 주석에서 "나는 내 책보다도 필립의 책들을 더 좋아한다"고 썼다. 멜랑히톤 역시 "나는 루터와 떨어지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고백하였다. 루터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하면서 "나는 루터로부터 복음을 배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반대였다. 필립은 부드럽고 루터는 거칠었다. 필립은 섬세하고 소심하였지만, 루터는 대담하고 털털했다. 루터는 자신을 활동적인 베드로에 비유했고, 멜랑히톤은 조심스럽고 사려깊은 야고보에 견주었다.
멜랑히톤과 루터는 성경원문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또한 그는 루터에게 신약성경을 번역하도록 부담을 주었다. 결국 루터는 1521년 12월부터 3개월 만에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신약을 번역하였다. 1522년 3천부가 책으로 인쇄되었다. 루터는 멜랑히톤과 비텐베르크의 전문가들과 더불어 구약성경까지 번역하였고(1524년), 1534년 비텐베르크판 성경전문이 출판되었다.

4. 신학자 멜랑히톤
그는 목사는 아니었지만, 탁월한 신학자였다. 그의 강단은 교회의 설교단이 아니라 대학의 강의실이었다. 1521년 로마서를 기초로 '신학총론'(Loci communes)를 출판하였다. 핵심 내용은 죄와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었다. 루터는 이 책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책을 능가할 다른 책은 없다. 이 책은 불멸의 저작이며, 교회에서 정경과 같이 평가할만한 책이다." 실제로 오늘도 사람들은 이 책을 개신교 최초의 교의학 저술로 평가한다. 당시 이 책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보완되어 출판되었다.
멜랑히톤은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4월부터 9월까지 작센신학자들의 대변자로서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지속된 논쟁과정을 통해 그는 '신앙고백문'을 작성하였다. 이 글에서 멜랑히톤은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관행들을 지적하고 신앙의 근본토대에 대해 서술했다. 그는 루터에게 보내어 내용을 검토하도록 하였는데 루터는 매우 만족해하였다. "나는 필립 멜랑히톤의 변론서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매우 맘에 들었고 내가 수정하거나 덧붙일 내용이 없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책이 우리가 바라고 기도하는 수많은 결과를 내게 하소서. 아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n Augustana)는 1530년 6월 25일 황제와 제후들 앞에 제출되었다. 7명의 제후들과 뉘른베르크, 로이틀링엔 두 곳의 제국자유도시가 이 신앙고백서에 서명하였다. 이 고백서는 21장으로 이루어졌다. 제1장 신론, 제2장 원죄론, 제3장 기독론 그리고 핵심은 4-6장으로 칭의론이다. "죄용서와 칭의는 인간의 봉사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 믿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죄를 용서하시고 의와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 제20장에서 "선행은 이루어져야 하지만 은혜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사람들은 선행을 하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멜랑히톤이 이 신앙고백서를 제출했던 목적은 교회의 하나됨이었다. 신앙의 본질 속에서 가톨릭교회를 포함하여 모든 교회가 하나되기를 원하였다. 감격의 눈물 속에서 이 신앙고백서를 마무리하였고 제국의회에 제출되는 것을 보았다. 개신교의 핵심교리가 처음으로 공개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황제는 이 고백서가 기존 국가와 교회의 질서를 파괴할 위협물로 보았고, 엑크(Johannes Eck)가 주도하는 가톨릭 신학위원회에 반박문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갈등은 몇 달 뒤에 개신교 제후들과 도시들이 참여한 슈말칼덴동맹이라는 정치적인 규합으로 이어졌다. 결국 전쟁의 징후가 드러났기에 멜랑히톤은 루터에게 쓴 편지에서 "여기에서 우리는 극심한 염려과 끊임없는 눈물 속에서 살고 있다"고 적었다.

5. 교육자 멜랑히톤
멜랑히톤은 1518년부터 1560년 그가 죽을 때까지 비텐베르크에서 가르쳤다. 특별히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고전을 읽고 주해를 달았다. 또한 수사학, 윤리, 물리, 역사, 지리 등 다방면에서 걸처 강의를 진행하였다. 그가 쓴 책들은 유럽 전역에서 수업교재로 채택되었다. 그의 강의에는 4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언제나 최고의 강의였다. 그리하여 당대 독일인들은 그를 'Praeceptor Germaniae' 즉 '독일의 선생'으로 불렀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프랑스, 영국, 헝가리, 폴란드, 덴마크, 체코(보헤미아),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에서 온 학생들은 공부를 마치고 돌아가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멜랑히톤에게 평생 감사했는데, 당시 점수가 적힌 학위증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지도교수의 개인적인 추천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멜랑히톤은 수많은 추천서를 써주었고, 당연히 효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멜랑히톤에게 수많은 제후들과 도시들이 교육자문을 구해왔다. 대표적으로 뉘른베르크를 들 수 있다. 멜랑히톤은 그곳에 1526년 처음으로 고등학교를 세웠다. 전적으로 새로운 교육제도와 학교시스템이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김나지움의 원조가 되었다.

6. 멜랑히톤의 일상과 죽음
조용히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의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수많은 학자들과 신학자들과 제후들이 멜랑히톤을 찾거나 초청하여 교류하였다. 그가 교환한 편지들만 9500통이 넘었다. 하루에 편지 10통을 써야했던 날들도 많았다. 아침 6시면 펜을 들어야 했고, 강의와 상담과 저술이 일상이었다. 그는 또한 수많은 여행을 떠나야 했다. 수차례의 제국의회 방문과 체류, 수많은 논쟁과 회의의 자리들이 있었다. 1530년에는 아우쿠스부르크 제국의회, 1540~41년에는 보름스와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참석했다. 레겐스부르크로 갈 때에는 그의 마차가 추락하여 그는 심하게 부상당했는데, 한동안 글씨도 쓰기 어려울 정도였다.
멜랑히톤은 1560년 4월 19일 그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행 중에 독감에 걸렸고, 몸이 병약해져 결국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14살 많은 루터가 63세로 삶을 마감하였듯이, 정확히 14년 뒤 멜랑히톤 역시 63세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 두 사람은 비텐베르크의 궁성교회에 묻혔다(사진5). 설교단 밑에는 마틴 루터가, 맞은 편에는 필립 멜랑히톤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별첨
- 독일 남서부 지역 종교개혁지 탐방 안내
루터가 활동했던 종교개혁지를 이미 탐방한 분들에게는 독일 남서부지역을 추천한다. 멜랑히톤의 고향 브레텐과 인접한 곳에 세계문화유산인 마울브론 수도원이 있다. 또한 루터가 논쟁을 펼친 하이델베르크, 그 논쟁을 지켜본 신학생들 가운데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던 요한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가 활동했던 슈베비쉬할과 슈투트가르트도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슈투트가르트에는 독일성서공회가 자리하고 있고, 벤츠와 포르세 박물관도 유명하다. 한국건축가가 설계한 시립도서관도 방문할만하다. 또한 1시간 거리에 신학의 도시 튀빙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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