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곡작은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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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도회 ] 처음 세워진 '작은자 선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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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20일(화) 09:43

1985년 말 보건사회부 통계에 의하면 장애인이 전국에 91만 5000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시설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장애인은 1만 1141명에 불과했으며, 이 또한 18세 미만의 장애인에게 해당되는 일이었다. 어린 장애인이 성장하면 그의 가족들은 나이가 들거나 사망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하루하루 삶이 곧 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장애인들을 위한 사랑의 공동체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황화자 총무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게 조그만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소서!' 1985년 12월 장애인 공동체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시작됐다. 

장애인 공동체 설립 소식을 들은 한응수 목사, 서기봉 목사, 서홍석 장로, 권종철 집사가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 있는 땅을 1986년 5월에 기증해 주었다. 한응수 목사는 그 곳에서 두레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공동체가 완전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기에 나대지로 있는 땅들이 제법 넓었다. 한응수 목사는 영송교회 김창렬 목사에게서 이 땅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창렬 목사는 전남 보성군 벌교 영송교회 담임목사였고, 1983년부터 한아협의 후원을 받으며 영송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김창렬 목사는 부흥회를 인도하러 경기도 양주군 가납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자 집사 한 사람이 김 목사를 찾아왔다. 그는 연곡리에 있는 땅을 기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헐값으로 팔겠다고 했다. 김 목사는 농촌선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농촌부 간사인 한응수 목사를 알고 있었다. 김 목사로부터 연곡리 땅 소식을 들은 한응수 목사는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아 그 땅을 샀다. 그리고 그곳을 두레공동체의 터전으로 삼았다. 한응수 목사는 농촌부 간사로 남양만 간척지 농촌사역, 특별히 어린이집 사역을 통해 KNH 후원사업을 잘 알고 있었다. 한아협 발족 이후 계속 KNH 후원 관계 일을 하고 있는 황화자 총무와도 막역한 사이였다. 결국 황 총무의 장애인 공동체 설립 계획을 들은 한응수 목사는 비어 있는 땅에 건물을 짓도록 했다. 
황 총무는 1988년 독일 KNH 본부에서 열린 한국과 독일 목회자 모임에 참석하면서 독일의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고 장애인 복지 사업을 위한 견문을 넓혔다. 한아협 운영위원들도 1988년 8월 연곡작은자의집 운영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을 바탕으로 작은자후원회 임원들은 조금 더 세부적인 운영계획을 세웠다. 세부 운영계획들은 또 다시 한아협 운영위원들이 검토했다. 건축추진 위원회 구성도 준비됐다. 
1989년 7월 5일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산 1-1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중교통이라고는 의정부시에서 출발하는 하나의 노선버스 밖에 없었는데도 73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연곡작은자의집을 찾았다. 연곡작은자의집 개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계획은 많은 장애인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도했다. 그런데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생겼다. 거처할 곳을 급히 마련해야 할 사람들도 있었다. 연곡작은자의집 건축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임시거처로 연곡작은자의집이 마련됐다. 이 날 개관 예배와 현판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도 중이던 갈 곳 없는 장기 중증환자들이 쉴 수 있는 작은 집'이 마련된 것에 감사했다.(선교와 사회복지, 합본 1228)

중증장애인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연곡작은자의집 건축을 꿈꾸고 함께 기도했던 사람들은 개관식 날 그들의 꿈이 현실이 된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 작은 사랑의 집이 장애인 돌봄과 재활, 장애인 선교, 복지 증진과 생명사랑 운동의 초석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연곡작은자의집을 '작은자 선교관'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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