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동 감나무골 사람들

은행동 감나무골 사람들

[ 여전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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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10일(화) 15:32

활빈교회와 노무라 목사, 독일의 KNH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청계천 어린아이들은 더 이상 방치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식사 때가 되면 밥을 먹었고, 즐거운 놀이도 하였다. 그들을 돌보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상급학교에 갈 수 없는 청소년들은 밤이면 그토록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주민회를 통하여 의료서비스도 받았고, 필요한 지식도 쌓았고, 일자리를 구하였다. 송정동 73번지 사람들은 안전한 마을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러나 청계천 판자촌 철거는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안전한 마을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흩어져야 했다.

1968년 서울시와 건설부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성남지구에 주택단지 사업을 계획했다. 이 지역에 복지시설, 문화시설, 경공업단지 등을 조성하고 인구 20만 명이 사는 위성도시로 개발하겠다는 전제 아래 서울에 있는 무허가 5만여 채를 철거하고 철거민들을 광주 성남지구에 살게 하겠다는 계획이었다.(동아일보, 1971. 8. 11) 이에 따라 철거민 한 가구당 대지 20평이 주어졌다. 이주비용은 은행 장기융자로 지원되었다. 그러나 철거민들은 원금과 이자 상환이 어려웠다. 그곳에는 당장 생계를 위해 일할 곳이 없었다.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일터, 동대문시장이나 을지로에서 너무 멀었다.(작은자복지선교회 20년사, 77-79) 서울에서 품팔이로 하루 몇 백 원 벌지라도 왕복 버스비로 50원을 써야 하기 때문에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동아일보, 1971. 8. 11)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집터를 팔아 생계비에 보태고는 남한산성 밖 금단산 중턱에 천막을 치거나 판자로 무허가 집을 지었다. 아직 행정지번도 없고 '하늘을 지붕 삼은 베들레헴의 외양간 같은'(기독공보 1977. 2. 12) 이곳을 사람들은 '달나라, 별나라'라고 불렀다. 단칸방 불빛이 하늘의 별과 구별하기 힘들다고 해서, 또는 시가지 전등불 보다는 달과 별이 더 가깝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이들은 연탄을 살 수 없어서 밤이 되면 감시자가 없는 틈을 타서 나무를 벌목하여 땔감을 만들고, 아침에는 보리밥, 저녁에는 막국수로 허기를 달래며 살았다.(기독공보, 1977. 2. 12)

1971년 8월 10일 이주민 택지 비용 문제로 광주대단지에서는 궐기대회가 열렸다. 연이어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듣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생 최규성 전도사가 이곳에 왔다. 중산층 유치 계획이 전혀 없는 이곳에 철거민과 전매입주자들과 무단입주자가 거의 160만여 명 정도 살고 있었다. 전매입주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서울에서 셋방살이를 하다가 내집 마련을 할 생각으로 이주한 영세민이었다.(동아일보 1971. 8. 11) 이곳에서 최규성 전도사는 돈이 없어 중학교 다니는 학생들을 부러워하며 신문팔이를 하거나 공장에 다니는 청소년들을 보았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눅 4:18)"이란 말씀이 최규성 전도사에게 사명처럼 다가왔다. 그는 삭발을 하고 그 곳 사람들과 결혼하겠다는 다짐을 했다.(연세동문회보 1977. 3. 15) 최규성 전도사는 그가 다니던 영락교회 석주옥 권사에게 그의 별장, 낡은 농가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는 교육을 통하여 문화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겠다는 '활민(活民)'의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1971년 11월 1일에 감나무골, 성남단지 단대 1리 205번지 언덕 위에 '서울고등공민학교' 문을 열었다.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후원으로 천막학교 1동이 마련됐다. 이 학교는 자혜촌(慈惠村) '달나라 별나라' 청소년들이 내일을 준비할 곳이었다. 천막촌에 세워진 천막학교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낮 동안 공장에서 일하고 학교에 온 학생들은 밤에 석유 등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교육을 위해 태극기도 걸려 있었다. 처음 학교가 세워졌을 때 주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최규성 교장은 주민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1년 정도 지나자 150명 정도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성남단지에는 17개의 무인가 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들은 800원이나 1000원 정도 수업료를 내야 했다.(대한일보 1972. 11. 8) 그조차 내기 힘든 학생들이 이 학교에 왔다. 그래서 최규성 교장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무인가 학교이기에 정부지원을 받지 못했다. 교회나 개인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운영되었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과정도 있었지만 이듬해 인근에 초등학교가 생겼다. 그래서 이 학교에서는 중고등학교 교육과정만 교육했다.

처음 시작되었을 때, 교사는 최규성 교장과 전직 초등학교 교사였던 김상현 두 사람이었다. 차츰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봉사자로 나섰다. 1년이 지날 쯤에는 9명의 교사가 세워졌다. 최규성 교장 뿐 아니라 교사들 모두 강사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강사회비라는 것을 내서 분필도 사고, 학생들의 문구류를 샀다.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카네이션을 만들어 대학교 정문에서 팔았다. 자선판매로 번 돈으로 시멘트 블록을 만들어 교실을 지었다. 인형 만들기, 나무뿌리와 솔방울로 조각품 만들기, 서해안 모래와 조개껍질로 액자와 조각품을 만들며 공예기술도 익히고 제품을 팔아서 장학기금도 마련하였다. 한 독지가가 후원금 대신 돼지 새끼를 분양해 주어서 돼지 사육도 했다. 주변에 집이 들어서서 돼지 사육은 시험해 보는 것으로 끝났고, 다른 일도 시설 부족과 판로 문제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런 시행착오가 있기는 했지만 이 학교는 성남시내 공장에 다니는 근로 청소년들의 배움터가 되었다.

1972년 최규성 전도사는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문제연구소에서 6개월 과정의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우리의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지역 주민들에게 이곳이 살 곳이라는 새마을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 땅에 장미꽃을 심어야 합니다."(대한일보 1972. 11. 8) 병원이나 약국에 갈 돈이 없어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약국을 찾는 지역주민 대상으로 연세대 의과 대학생들이 매월 2회 치과 진료와 3회의 일반 진료 봉사를 해주었다. 마을금고와 협동사업, 소비자조합운동도 벌이면서 경제자립 의식을 고취시켰다.(연세동문회보 1977. 3. 15) 이 외에도 지역사회 조직사업을 시행하여 청년 지도자 30명이 8회에 걸쳐 교육받았고, 30여 명의 주민들은 주민회의를 통해서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협의하고 개선해나갔다. 경로사상 고취를 위해 지역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도 베풀어졌다. 달나라 별나라에 정착하여 '천막교실 선생님'이 된 최규성 전도사는 이렇듯 주민들과 30여 명의 무의탁 청소년들과 가출 청소년, 신문팔이, 구두닦이, 넝마주이들의 친구가 되었다.(기독공보 1977. 2. 12)

3년이 지나 중등과정 첫 졸업생이 생길 무렵 그동안 땅을 무상으로 빌려 주었던 석주옥 권사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부득이 다른 사람에게 땅이 팔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중학과정 178명, 고교 과정 34명이었고, 평균 연령은 18세였다. 중학 1학년 과정에는 22세 학생도 8명이나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공장에 다니며 월 4000원에서 1만5000원 정도 벌었고, 밤에는 학교에 와서 졸면서 공부를 했다. 이들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숙대 등 9개 대학교 대학생 32명의 강사들이 '대학생봉사회'를 만들고, 용돈을 줄여 모금을 했다. 진료와 교실도 더 많이 필요했다.(동아일보 1974. 6. 11)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7. 은행동 감나무골 사람들(하)

사단법인 대한청소년 성경구락부에서는 1974년 7월 1일 성경구락부 설립을 승인해주었고 명칭을 '제일중고등성경구락부'라 하였다. 무인가, 무허가 학교였던 이 학교가 이로써 소속이 생기게 되었다. 학교 입구에는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맨 위에는 '활민부국', 오른쪽 기둥에는 '대한청소년 성경구락부 제일실업중고, 성남근로자청소년학교, 교훈, 깨닫자 뭉치자 세우자', 왼쪽 기둥에는 '국민 중고등학교 의무교육 자율화연구실험센타'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이것은 '백성이 잘 살아야 복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활민부국(活民富國)'과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돈이 없어도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초중고등학교 의무교육'이 실행되어야 한다는 최규성 교장의 교육 신념이었다.(청소년의 등불, 18) 이 학교를 중심으로 세워진 '머릿돌교회'도 '활민교회'로 개칭되었다.
이후로도 천막학교는 계속 같은 곳에서 유지되었다. 5년여가 지나자 동네에 가로등도 생기며 신흥주택가로 변모해갔다. 그러나 천막학교의 천막은 낡았고 비가 오는 날이면 책상 밑에 책을 펴놓고 공부하거나 공부하기 전에 교실 바닥에 고인 물을 퍼내야 했다. 심한 소나기로 산에서 황토가 휩쓸려 내려와 교실을 뒤덮으면 비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업을 계속하기도 했다. 겨울에는 어둡고 차가운 교실에서 손이 얼고 발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런 곳이었을지라도 학교에 가는 것이 "어찌 그리 좋았는지 모릅니다"라고 훗날에 그 학교 졸업생 정종삼은 회고한다.(청소년의 등불, 9) 이렇게 공부한 학생들이 중학교 과정 졸업식 2회, 고등학교 과정 졸업식 1회를 통해서 1975년 70여 명이 졸업하였다. 이 중 50여 명의 학생들은 중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중앙일보 1976. 11. 29 )
1976년 9월 강렬한 태풍으로 주야간 중등과정 260명, 주야간 고등학교 과정 81명의 교실인 천막 4개동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경기도 조병규 도지사가 보내 준 천막들이었다. 하나 남은 천막교실로는 학생들이 다 수용되지 못해서 노천교실에서 공부했다. 12세부터 34세까지 망라되어 있는 학생들은 '우리 학교 우리가 짓자'는 마음으로 '1인 10장 벽돌 모으기 운동'을 벌이며 주일에는 머릿돌교회에 모여 예배드렸다. 여학생이 60%이며, 야간 학생이 70%였지만, 학생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고 늦은 밤 산비탈을 삽과 괭이로 파서 학교 부지를 닦았다.
KBS와 MBC 방송을 통해서 이 소식이 널리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주한 독일대사관에서 70만원, 국회의장실에서 20만원의 후원금을 보내왔다. 최채준이라는 지역주민과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에서도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1976년 9월 21일 천막학교 육성을 위한 지도위원회도 구성되었다. 도시문제연구소 소장 연세대 노정현 교수가 위원장을 맡았고, 위원으로는 마애린 여사(성경구락부 본부장), 민경배 교수(연세대 교목실장), 유종해 박사(새서울 라이온즈클럽 회장), 연세대 신현주 교수, 타요한 선교사(남장로교 선교부), 우열성 선교사(연합장로교 선교부), 왓슨 여사(호주장로교 선교부), 구룬발트 주한 독일대사관 무관, 미8군 장교부인회의 테일러 여사, 웨이안드 미8군 신부, 김윤식 목사(전 예장 총무) 등 모두 12인이었다. 새서울 라이온즈클럽에서 70만원을 후원해주었다.(기독공보 1976. 10. 9) 이런 도움과 학생들의 노력으로 103평의 교실 4면 벽이 완공되었다. 그런데 1976년 10월, 사유지 무허가 건물이라고 성남시에서 철거 지시가 내려왔다. 스웨터 공장에 다니며 이 학교 고2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던 조정종(당시 21세)은 "벽돌 한 장 마다 우리들 손끝이 안 닿은 부분이 없다. 저 교실은 우리들의 몸과 같다"면서 울먹이기도 했다.(중앙일보 1976. 11. 29) 학생들에게 이 건물은 '불법이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생존이요, 사랑'이었다.(청소년의 등불, 32) 철거반이 나오면 학생들은 직장을 결근하면서까지 교실 벽을 팔띠로 가로막았다. 이 소식이 기독공보와 연세동문회보에 실렸다. 이런 상황은 1981년 30만원의 벌금형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계속 공부하였고, 중고등학교 과정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했다. 그 가운데 2명은 대학 예비고사에 합격하기도 했다. 해마다 중등과정을 이수한 30여 명의 학생들은 기술자로 공업단지에 취직하여 어려운 가정살림을 도왔다. 이들에게 천막학교의 졸업장은 '황금보다 더 빛나'보이는 것이었고, 졸업식장은 "마치 초상집과 같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이 당시 졸업생 정종삼은 20년도 훨씬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격스러워했다.(청소년의 등불, 9) 최규성 교장은 "불우학생들이 하나 둘 자기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고 말하면서 사회개발에 뜻을 둔 나라의 일꾼을 만드는 데서 보람을 느꼈다.(연세동문회보 1977. 3. 15.) 그리고 '사랑의 샘' 회원 모으기 운동을 펼쳤다. 이것은 근로청소년들의 학비를 보조해주는 '학부형 결연운동'과 주일예배 참석도 못하고 일하는 근로청소년들을 찾아가 교회가 되어주는 '선교회원 자원운동'이었다. 또한 최규성 교장은 무인가 학교를 계속 고집했다. 인가를 받게 되면 유자격 교사채용, 시설확충에 따른 비용이 자연스럽게 피교육자 부담이 되고 가난한 청소년들은 또 다시 소외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크리스찬신문, 1977. 3. 12) 그는 중고등학교 과정 뿐 아니라, 무연고 청소년 기숙사, 청소년 상담과 취업, 자녀교육 및 가정상담, 문맹 성인 사회교육, 일요청소년학교 등도 운영하였고, 부업 알선도 하고 주민체육대회도 열었다. 야간학교는 낮 동안 맞벌이 부부를 위한 탁아소가 되었다.
최규성 교장의 열정이 외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1978년 남양만에 왔던 독일 KNH 총무 루어스 박사가 성남제일성경구락부를 방문하였다. 노정현 교수의 소개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루어스 총무는 노무라 목사, 황화자 전도사와 함께 학교와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그리고 1978년 12월부터는 KNH 후원금이 전달되었다. 주한 호주대사관, 동성남청년회의소 등에서도 후원금을 보내왔다. 1981년 30만원의 벌금형을 내린 재판장은 그가 내린 벌금 30만원 보다 10만원이 더 많은 40만원을 익명으로 후원하였다.(청소년의 등불, 35) 결국 성남제일성경구락부교장과 교사, 학생들의 끈질기고 간절한 기도로 교실과 교회가 새롭게, 부서지지 않도록 벽돌로 건축되었다. 이 벽돌 학교에서 학생들은 저녁도 먹지 못하고 물로 주린 배를 채우며 열정적으로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만났고, 형제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으로 알고 서로 아픔을 나누며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었으며, "배우고 싶어도 가정의 어려움으로 배우지 못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배움을 맛보게 하는 그러한 선생님이 되겠다"는 소망을 품었다.(선교와 사회복지 합본 I, 21)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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