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타살?

사회적 타살?

[ 연재 ]

조성돈 교수
2014년 01월 13일(월) 14:10

생명이 존중되는 사회가 우선
  
지난 12월 31일 한 남성이 '특검 실시', '대통령 퇴진'이라는 현수막을 서울역 고가도로에 걸고는 분신 자살했다. 이후 그 죽음은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되어졌다. 그의 의도는 물론 유서에 잘 나와 있지만 여론은 그 이상의 해석을 원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나 '열사'와 같은 단어들로 뜻 지어졌고, 거창한 장례로 이어졌다.
 
이제 그의 죽음을 논한다는 것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를 열사로 보는 시각과 그의 개인적인 배경에서 죽음의 이유를 보려는 시각은 양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죽음이지만 각자의 정치적 배경에 의해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예방이라는 시각에서 보게 되면 다른 설명이 나온다. 이유야 어떠하던 한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자살'이라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그의 죽음을 어떠한 틀에서 해석하고자하는 노력은 아니다. 단지 죽음, 자살이라는 현실에 대한 것이다.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는 시각은 그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도록 이 사회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사회의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는 것이다. 과연 타살이라는 시각은 정당한가?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살은 어떤 것으로도 미화되거나 영웅시 될 수 없다. 2004년 한국자살예방협회와 한국기자협회는 자살에 관한 '언론보도권고기준'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거기에 따르면 자살에 대해 보도할 때 준수해야 할 사항 네 번째에 자살을 영웅시 또는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자살에 어떠한 명분이 붙어 있고,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될 수 없다.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영웅시, 미화한다면 그 한 생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자살을 불러올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이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이미 고 노무현 전대통령이 자살했을 때 겪었다. 그 경우는 좀 다르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때도 우리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논쟁을 했었다. 특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봉화마을에 내려가 장례미사를 집전할 당시 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정의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살이 아니고, 그의 구원은 열려 있다"고, 그래서 "장례미사는 정당하다"고 설명했다. 물론 천주교에서도 자살한 자들에 대한 장례미사가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분들이 모르고 한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인식, 즉 그의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는 인식이 국민적 논쟁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한 해인 2009년 대한민국의 자살은 급격하게 늘었다는 것이다.
 
생명이나 죽음은 절대적인 가치이다.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해석되어질 수 없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이 절대성에 거룩함을 더 한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허용되어질 수 없다. 절대적 가치인 생명을,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끊어버린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치적 이유로 인해서 그것을 해석한다. 미화하고, 그 행위를 이룬 사람을 영웅시 한다. 즉 절대적 가치인 생명이 상대적 가치인 정치나 신념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이다.
 
시대가 하수상하다. 서로가 너는 그러고도 안녕하냐고 묻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음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그렇게 안녕할 수는 없다고. 물론 그의 진심은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 앞에 숙연해지고, 마음 아프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절대적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할 것은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명의 가치 앞에 나는 진실한지 다시 묻고 싶다.

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사회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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