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도들과 함께 떠난 일본 평화기행(상)

신학도들과 함께 떠난 일본 평화기행(상)

[ 연재 ] 일본 평화기행(상)

임성국 기자 limsk@pckworld.com
2013년 01월 21일(월) 10:01

본교단 신학대학교 교수와 학생들로 구성된 오이코스신학회가 기독교평화센터(소장:오상렬)가 기획한 '일본 평화기행'에 동행했다. 이번 평화기행은 과거 역사를 바로 깨닫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모색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평화적 대안과 방법론을 모색하기 위한 취지에서 기획됐다. 기자가 동행한 지난 14~18일까지 일정의 평화기행을 고쿠라, 나가사키 등 지역별로 나누어 2회에 걸쳐 기획한다. <편집자 주>

"잊혀진 역사, 이제 생명 평화 정의로 다시 읽는다"

현해탄 건너 고난의 길, 고향땅 그리며 타국에 묻혀
기행단, 몸으로 평화 체험…동북아 평화 위해 기도


1965년 한ㆍ일 국교 수립 후 양국의 관계는 외형적으로 크나큰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을 설명할 때면 언제나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위안부와 독도분쟁 등 가슴 아픈 과거사가 활화산처럼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사의 아픔과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 속에 양국 간에 진정한 평화가 공존할 수 있을까! 멀게만 느껴지는 일본은 언제쯤 우리에게 가까운 나라로 다가 올 수 있을까! 그때에는 양 국가가 과거가 아닌 미래의 생명ㆍ평화ㆍ정의 관점에서 바른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사전적 의미의 '평화'를 뛰어넘어 폭력과 전쟁의 상처를 돌아보며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신학적 평화의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1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오이코스(OIKOS) 신학운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학생들과 교수들이 '신학 앎과 신학 함'을 실천하기 위해 일본 평화기행을 떠났다.

기독교평화센터(소장:오상열)의 기획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평화기행은 동북아시아의 평화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목적으로 복음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발길이었다.

오는 10월 WCC 총회를 앞둔 부산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기 위한 첫 일정은 시작됐다. 한국측 참가자 스무 명이 지난 14일 오후 부산항에서 '눈물의 연락선' 부관 페리를 타고 시모노세키를 행해 출발했다.

'빨리'와 '편함'을 추구했다면 굳이 배를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현해탄을 건너며 일본에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 12시간 이상 소요되는 배를 교통편으로 선택했다.

현해탄에서 이름 모를 한국인들이 느꼈을 신음은 겨울 바다의 파도가 되어 선박을 흔들었고, 진정한 평화를 찾아 나선 참가자들은 실천적 삶의 각오와 침묵의 기도로 소통했다.

일행으로 참가한 정경호교수(영남신대)는 "우리는 일본의 문화, 기독교를 이해하고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감당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며, "평화를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는데 희생자들의 자리에 찾아가서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것 또 평화의 첫 출발이다. 이번 '여행신학'을 계기로 진정한 생명 평화 정의를 논의하고 이 시대에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기획된 여행 프로그램에 의미를 담았다.

다음 날 아침, 구름이 잔뜩 낀 시모노세키 항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청일강화기념관의 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1895년 청일전쟁 직후,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고, 중국은 시모노세키조약을 치욕의 역사로 기록한다.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빼앗아 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다는 씻을 수 없는 역사를 확인한 채 기념관을 떠나는 일행의 발길은 무거워 졌다. 하지만 조선으로부터온 강제노동자들이 잠들어있는 고쿠라교회(주문홍목사 시무) '영생원'을 찾은 일행의 발걸음은 한걸음 조차 내딛기 힘들 정도로 더욱 무거워졌다.

영생원은 재일 인권운동가였던 故 최창화목사가 시무했던 고쿠라교회의 납골당이다. 규슈지역 탄광에 끌려와 일하다가 숨진 조선인들이 이곳에 안치된 것이다. 일부 유골은 불명이라고 적힌채 볼품없는 상자에 담겨 있기도 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에 통탄하고 참담했다. 재일 한인들의 노력보다 못한 무능한 정부의 대책에 일행은 가슴은 미어졌다.

이어서 기행단 일행은 '오다야마 묘지'로 향했다. 해방 후 고향땅을 바라며 현해탄을 건너다 숨진 조선인들이 묻힌 조촐한 묘지는 1990년 재일 한인들의 요구로 기타큐슈 시청이 위령비를 건립했다. 1994년에는 한글 안내판을 세워 귀환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한일 간의 진정한 평화를 원하고, 일본 내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한 양심있는 일본인들의 역할도 크게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쿠라 지역 평화기행을 마친 고다진전도사(대전신학대학교)는 "영생원과 오다야마 묘지를 방문하고 머리로만 알고, 그동안 가슴으로 느껴보지 못했던 역사의 현장을 보게되었다"며, "일본을 거시적으로만 바라봤는데, 미시적인 역사도 보게 돼 이번 기행이 의미가 있었다"고 전했다.

조선인의 서러운 역사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는 청일강화기념관과 영생원, 오다야마 묘지에 묻힌 그들의 고달팠던 삶이 잔상으로 남아서 인지 일행은 말조차 잇지 못하고 침묵속에 다음 목적지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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