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자운동에 녹아버린 사람들, 작은자들의 어머니 황화자 총무(5)

작은자운동에 녹아버린 사람들, 작은자들의 어머니 황화자 총무(5)

[ 여전도회 ] 작은자들의 어머니

이승재국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6월 25일(월) 11:07

*작은자복지재단이 펴내는 '선교와 사회복지'에 연재되고 있는 고 황화자총무의 일대기를 여전도회면에 게재한다. 고 황화자총무에 대한 글은 작은자복지재단 이승재국장이 집필했다.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이지만 삶의 동반자로서 그녀의 삶의 한 자리를 지탱해 주던 남편은 1986년, 12년 간의 애처로운 투병생활을 마감하며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결혼생활이자 간병생활이었죠. 12년이란 세월, 제겐 슬픔이 아닌 남가의 세월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고생이 심했던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요. 또 아버지가 없는 환경보다 오히려 더 힘들었을 상황인데도 꿋꿋이 자라준 아이들도 너무 고마웠구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내게 일을 주시며 지켜봐주신 하나님. 또 일한 이유와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준 내 주위의 가난한 이웃들과 작은자들이 정말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남편을 떠나보낸 그 해 황화자 총무님은 새롭게 '작은자 운동'을 전개하 된다. 우리 주위의 병들고 가난하고 따돌림 당하는 작은자들, 그들에게 남편의 고통을 통해 '작은자 운동'의 희망을, 남편의 죽음을 통해 '작은자 운동'을 전개할 용기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경제가 신장됨에 따라 독일 KNH의 후원금도 조금씩 줄어들었지요. 사실 그것보다는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가 제대로 정신만 차린다면 우리 사회 작은자의 고통은 사라질 겁니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도록 애써야지도. 관심을 가지면 됩니다. 조금의 사랑이라도 나누면 됩니다. 작은자들, 그들 역시 우리의 자녀요 형제요 동포 아닙니까?"

 
처음의 낙망과 어려움의 시절을 지나 이제 '작은자 운동'은 한국교회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례 하나가 1989년 1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에 세워진 '작은자의 집'(현 요셉의 집)이다. 의정부 두레교회(당시 한응수목사 시무)의 부지기증과 3년 간의 모금운동을 통해 건립된 이 집은 '작은자 운동'의 살아 있는 표본인 셈이다. 당시 중복장애와 뇌성마비, 근육 드스트로피, 척추장애, 정신지체 등의 장애를 가진 장애우 25명과 봉사자 4명이 함께 어루러져 사랑하고 격려하는 이 집은 여느 시설에선 볼 수 없는 사랑과 명랑함이 넘쳐 흘렀다. 이 집 식구들의 대모가 바로 황 총무였다.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이곳에 들러 함께 먹고 자고 사랑을 나누는 그녀를 이 집 식구들은 보통 '엄마'나 '어머니' 또는 '전도사님'으로 불렀다. 이상하게도 이런 시설이면 보통 불리게 마련인 '원장님'이란 호칭은 잘 사용되지 않았다. 봉사자였던 이숙옥권사(당시 65세)는 부산에 자녀들과 함께 살면서도 이곳이 좋아 한 달에 3주 정도는 작은자의 집에 머무르며 장애인들을 도우며 생활했다.


"사실 식구들 모두가 어머니같이 느끼거든요. 저도 봉사활동을 좋아하는 편이라 꽤 많은 시설을 돌아다녀 봤는데 전도사님 같은 분과 이런 곳은 정말 보지 못했어요. 모두가 편하고 명랑하고 생동감이 넘쳐요. 참 기쁘게들 살지요. 이곳을 위해 기도하는 손길이 참 많다는 걸 생활을 통해 체험하곤 하죠." 이순옥권사의 말이다.

 
1990년 11월, 성탄절을 앞둔 때에 작은자의 집 식구들이 작사, 작곡해 복음성가 음반을 내기도 했다.

 
"억지로 재활교육을 시키진 않으려 해요. 각자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스스로 발견하고 계발해 가도록 하지요. 그것이 훨씬 효과적이란 걸 체험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도 이 곳 식구들은 늘 명랑합니다. 찬양도 기도도 아주 열심이지요. 저 자신이 식구들한테 배우는 게 너무 많아요."

 
일하는 와중에도 숭실대 대학원에서 사회사업학을 전공하고 미국 맥코믹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과정을 마친 그녀는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목회연구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성훈련'과 '목회연구' 과목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녀는 '고추 파는 교수'란 특이한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고추파동이 났을 때 농촌에서 목회하는 제자가 그 지방 고추를 싸들고 왔으나 판매망이 없어 고생하는 걸 보고 직접 뛰어다니며 전량을 판매해 준 덕으로 얻어진 별명이었다. 이런 경력 탓에 그녀는 후에도 마늘과 배추 따위를 계속 팔아줘야 하는 뜻하지 않았던 수완(?)을 발휘해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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