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31일

12월 26~31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12월 22일(목) 15:08

월-빨간 크리스마스
본문: 마 2:1-11
찬송가: 269장(구 211장)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께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였다. 그렇다면 구원 사역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었을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태어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살아가시는 하루하루가 십자가를 향한 행진이었다. 헤롯의 속셈은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아기예수를 죽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하나님의 시간대에 맞추어서 뒤로 미뤄져야 했다. 동방박사들의 선물 중 몰약은 죽음과 연관되는 예물이다. 몰약은 값비싼 향료,화장품의 재료였지만 약품으로는 시체에 바르는 방부제로 사용했다. 몰약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이는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있었다. 요단강 물에 당신의 몸을 잠그심은 십자가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고,물에서 나오심은 부활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예수님 공생애의 첫번째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났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받게 되는 영광이다. 즉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이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고,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의 영광과 직결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다. 예수님 말씀 중에서 성전은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전을 헐라'는 언급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말씀하고 있고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언급 속에서는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 당신은 한 알의 밀로써 이 땅에서 오셨다. 이 밀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면서 십자가 죽음을 향한 적극적인 마음 새를 드러내신다.
 
이 모든 말씀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결연한 의지는 당신은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마음의 중심에는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 있다.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십자가 죽음이 보이는 빨간 크리스마스로 나타난다. 빨간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그리고 한 알의 밀로서 썩어지는 삶을 통하여,이 땅에 죽음을 제거해 버리고 생명을 가져 오시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을 듬뿍 담아내는 첫번째 출발점이 되고 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죽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의미를 확실하게 마음 속에 새기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우리를 사랑하시고,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사명을 가슴에 새길 수 있도록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광주서남교회 / 조택현목사

 


 

화-성육신의 의미
본문: 요1:14
찬송가: 125(구125)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성육신 하신 모습에 대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그 말씀은 태초부터 존재하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육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라는 말은 헬라어 '스케네요'라는 '텐트'라는 말에서 나온 동사이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말은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고 한 동안 살다 가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은  존귀하신 하나님이 볼품없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허름한 텐트 안에 거하신다고 상상해보라. 대통령이 노숙자의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테초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이신 우리 예수님은 이 땅의 이름 없는 마리아를 어머니로 택하셨고 목수 요셉을 양아버지로 택하여 이름 없는 동네의 여관 말구유에 태어나셨다. 이 일이 가당한 일일까?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일을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말씀이 육신이 되셨을까?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의 이 성탄의 계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첫째로 예수님 안에 있는 영광의 주 하나님을 보며 그 분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야 할 것이다.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는 주 예수님의 영광을 봐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보았다'라는 헬라어 원어 '테아오마이'의 의미는 '주의해서 보다' 또는 '집중해서 보다'라는 의미이다. 영어 영화관을 뜻하는 'theater'라는 단어가 이 헬라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성탄의 시즌에 예수님 안에 있는 주 하나님,독생자의 영광을 집중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이 성탄 시즌에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의미를 우리 삶에 그대로 육화시켜야 할 것이다.
영원하시고 존귀하시고 영광스러운 말씀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일시적이고 한계가 있고 남루한 텐트 같은 육신 안에 거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특히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도>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주 예수님!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인간의 육신 가운데 거하사 우리와 함께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마굿간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사 가난한 자와 낮은 자에게 희망이 되신 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독생자의 영광을 보며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석호목사 / 동춘교회

 


 

수-꼭 있어야할 세 가지 보배
본문: 마2:7-11
찬송가: 116장(구116)
 
옛부터 이 세상에는 보배라고 일컫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금전과 지식과 권력을 보배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에 "믿음,소망,사랑,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간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세 가지 보배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첫 번째 교회의 보배는 황금과 같은 믿음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시던 날 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다. 그러므로 동방박사가 드린 세 가지 예물은 오늘날의 우리 성도들과 교회에 반드시 있어야 할 세 가지의 보배라고 할 수가 있다. 신앙이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영적으로가 아니면 설명 할 수가 없다. 또 믿음이란 우리가 말로 하는 것처럼 그런 것이 다 믿음이 아니다. 불과 같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단련하고 연단된 정금과 같은 믿음이 바로 온전한 믿음이다. 독일의 신학자요 윤리학자인 쉴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영에 잡히는 느낌과 감정이 곧 종교적 신앙이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교회의 보배는 유향과 같은 기도와 행함이다. 믿음도 귀하지만 기도와 행함은 더욱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우리는 왜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물을 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신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행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열매이다. 우리 주님은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하셔서 죽게 하셨고,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땅만 버린다고 잘라 버리라고 하셨다. 성도들이 말도 잘하고 기도도 청산유수처럼 잘 하여도 행함의 열매가 없으면 모든 것이 위선이 되고 만다.
 
세 번째 교회의 보배는 몰약과 같은 희생과 봉사이다. 몰약은 썩는 것을 방지한다. 시체에 바르면 시체가 부패하지 않는 희귀한 약품이다. 희생과 봉사란 남을 위하여 나 자신과 내가 가진 것을 바치는 것이다. 벳새다 광야에서 어린아이가 가졌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렸더니 5천명이나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나 남는 기적이 일어났다. 소년이 자신이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드릴 때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과 봉사는 남도 위하고 자신도 위하는 것이 된다. 이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몰약과 같은 역할을 하여서 썩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이 다 썩어도 교회가 썩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우리 사는 이 사회 속에서 교회에 꼭 필요한 세 가지의 보배는 황금과 같은 믿음,유향과 같은 기도와 행함,몰약과 같은 희생과 봉사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황금과 같은 믿음과 유향과 같은 기도와 행함 몰약과 같은 희생과 봉사를 간직하는 성도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만영목사 / 예수비전교회

 


 

목-아브라함의 선택
성경: 창세기 13:8-18
찬송가: 374장(구 423장)
 
나귀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으러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얼마 떨어지지 않은 두 곳에 풀 더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동쪽에는 마른 풀이 풍부하게 있고,서쪽에는 양은 적지만 신선하고 맛있는 여린 풀이 있었다. 나귀는 동쪽 건초 더미 쪽으로 달려가 먹으려는 찰나 생각을 바꿨다. '서쪽의 풀은 신선한 게 맛이 끝내줄 거야. 지금 거기에 가지 않으면 다른 나귀들이 다 먹어버릴지도 몰라.' 나귀는 방향을 바꿔 여린 풀 더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다 다시 생각했다. '다른 나귀가 건초를 다 먹어버린다면 나는 분명 배가 고플 거야!' 그는 다시 동쪽의 건초 더미로 달려갔다. 나귀는 배불리 먹고 싶기도 하고,맛있는 여린 풀이 먹고 싶기도 하여서 쉬지 않고 두 곳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탈진해서 풀 더미 옆에서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수많은 선택의 갈등이 우리의 집중력을 분산시킨다. 그러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꾸어서 말하면 곧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한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들이 벧엘에 이르렀을 때 아브람 가축의 목자와 롯 가축의 목자의 다툼이 생긴다. 결국 그 일로 아브람이 롯과 헤어지게 된다. 벧엘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위해 처음으로 단을 쌓고 은혜를 받았던 아주 의미있는 곳이었다. 과거에 그들은 함께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했다. 그러나 오늘은 서로 갈등한다.
 
아브람은 롯에게 "나를 떠나라"고 한다. 그때 롯은 눈에 비옥하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한다. 그 땅은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비옥한 애굽 땅과 같았다.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죄가 넘치는 땅이었다. 결국 롯은 잘못된 선택으로 나중에 큰 불행을 당하게 된다.
 
인생은 선택에 달려있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그 선택에 대해 나는 평생을 걸고 책임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실수를 많이 한 사람이었지만 복의 근원이 된 이유는 선택을 잘했기 때문이다. 눈으로만 보면 아브라함은 한 발 후퇴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 발 전진시키시는 분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간다. 그러나 주님은 좁을 길로 가라고 했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길로 가야 한다. 그러면 몸은 조금 힘들어도 그것이 복이 된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동서남북으로 그 땅을 밟고 걸어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다 그의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걸어 나가야 내 땅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항상 정직하다. 약속을 믿고 내가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오늘을 진실하게 응답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내게 주신 분복을 하나님께서 누리게 하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
거룩하신 하나님,우리는 아직도 불신앙의 모습으로 온전히 주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아는 은혜를 허락하시고 주님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그리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정선목사 / 대연교회

 


 

금-그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가!
본문: 눅 2: 25-32
찬송가 424장(구 380장)
 
"현재가 어떻게 미래와 연결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가 미래와 어떻게든 연결되리라는 믿음이 자신감과 확신을 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인생이 변화될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말이다. 인류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다는 꿈을 꾸는 몽상가들을 통해 계속 발전되었기 때문에 내일에 대한 소망을 접는 것은 우리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성경에는 이런 몽상가들로 가득 차 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형편에서도 주저앉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내뿜고 있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만 믿고 자기 세계를 떠났다. 자기 세계와의 단절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그는 죽음 너머에 있는 희망의 약속을 얻기 위해 떠난 것이다. 
 
오늘의 본문인 시므온이 살았던 시대는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나라는 멸망된 지 오래였다.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신앙의 공동체이지만,당시 시대정신인 그리스 문화는 이 공동체마저 사라지게 하고 있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영원히 지속될 언약을 '할례'를 통해 세우신다. 그런데 시므온의 시대에는 이미 할례는 자랑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전통이 되었기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감추려고 했고,심지어 이것을 지우는 접합 수술까지 하는 세태였다. 하나님과 맺은 택함 받은 약속이 오히려 조롱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시므온은 구원을 기다리며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걸었다. 1백세 쯤 되는 시므온은 겨우 숨을 쉬는 앙상한 육체에 따뜻하고 생명의 기운이 충만한 아기 예수를 두 팔로 안고 솟구치는 감격의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오지도 않을 메시야를 아직도 기다리느냐는 조롱을 받은 것은 물론이요,사그러지는 육체를 지탱하며 눈 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시간 때문에 약속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불안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일생을 걸고 꿈을 이룬 시므온에게서 우리는 어떤 말을 듣는가. 대 주제여 주의 구원을 내 눈으로 보고 가슴에 품었으니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이것은 평생동안 원하던 것을 이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격의 말이다.
 
나에게는 어떤 기다림이 있는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과연 시므온처럼 인생을 걸고 기다릴 목표가 있는가?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꿈을 간직하며 이루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적 욕망과 집착을 절제하고 끝없이 노력하면서 자신을 믿어야 한다. 실패의 두려움과 오랜 기다림의 조바심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이다.
 
윈스턴 처칠 경의 삶의 고백을 보라. "지옥을 지나가고 있는가,그래도 계속 나아가라! 밤이 제 아무리 길다 해도 동은 반드시 튼다."
 
<오늘의 기도>
한 해의 끝자락이지만,아직도 나의 가슴에 시들지 않는 불꽃을 지키며 어떠한 두려움과 조바심을 이겨내며 시므온과 같은 감격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덕주목사 / 한들출판사

 


 

토-두 무화과 광주리 환상
본문 : 렘 24:1~10
찬송가 : 310장 (구 410)
 
가끔 TV에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을 방영한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 참혹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도 6.25 전쟁을 경험한 나라이다. 그래서 다시는 그 참혹했던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국력을 키우는 일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유다 나라도 우리와 같이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나라이다. 본문은 바벨론이라는 초강대국이 유다를 침략하여 왕과 고위관리와 기술자들을 끌고 간 뒤에 유다에 남은 것은 부모 잃은 아이들과 전쟁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뿐이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가?'라며 울부짖는다.
 
오늘 읽은 말씀은 이러한 배경 아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환상이다. 이때 유다나라에는 바벨론에 끌려간 자와 겨우 살아남아서 한탄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유다 땅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두 무화과 광주리의 환상을 보여주었다. 하나는 좋은 무화과로 가득찬 광주리고 다른 하나는 나쁜 무화과로 가득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환상을 보여주신 후에 의외의 말씀을 하신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좋은 무화과이고,유다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나쁜 무화과라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좋은 무화과라고 칭한 사람들이 이방의 포로로 끌려간 것인가? 그에 대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비록 그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지만 바벨론에서 수모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겸손히 받아드리고 자신들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다시 귀환할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바벨론에 잡혀가게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바벨론으로 보내어 고생시킨 것이다.
 
왜 하나님은 나쁜 무화과가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유다인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이들의 마음이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오직 애굽(세상)에만 관심이 있으며 믿음으로 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방법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꾸준히 믿음을 지키며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나의 생각에는 납득되지 않더라도 나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도 주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고난의 잔이라도 당당히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위해 묵묵히 견딜 수 있는 인내를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민준기목사 / 성심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