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11월21~26일

[가정예배] 11월21~26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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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16일(수) 11:42

월-아름다운 가정, 
본문 : 누가복음 9:21~27
찬송가 : 144장(구 144)
 
리비아 국가원수였던 무하마르 알 카다피가 42년의 철권독재권좌에서 쫓겨나 비루하게 죽었다. 그의 종말은 두더지처럼 땅에 떨어진 음식을 뒤지기도 하고 하수구에서 붙잡혀 끌려 다니며 두들겨 맞고 사살 당하여 쇼핑센터 정육점 냉동창고에 전시되어 구경거리고 되는 것으로 끝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열렬하게 환호한다. 얼마나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인가? 나 자신 또는 소중한 가족이 죽으면 어떠한 마음이 들까?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을까?
 
그가 이렇게 짐승보다 못한 최후를 맞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재산을 무려 2천 억 달러(원화로 2백40조원)로 추정한다. 리비아 인구 6백40만 명에게 1인당 3천4백만원씩 나누어 줄 수 있는 엄청난 숫자이다. 실상 그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구하다 생을 마쳤음을 알 수 있다.
 
가을날의 단풍을 보자. 얼마나 아름답고 고운가! 언제나 사람들의 사랑과 감탄을 자아낸다. 나무는 곧 다가올 겨울을 생각하여 과감하게 자기 몸에 붙어있는 잎들을 떨어뜨리는 자기포기의 아픔으로 그토록 화려한 색으로 물이 들게 된다.
 
무엇이 우리 가정을 단풍처럼 곱고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첫째로,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본받아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는 것이다.
둘째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그것은 온갖 수치와 조롱을 끝까지 참아내는 생활이다. 나를 포기함으로서 찾아올 수 있는 가난, 무시당함, 따돌림 등을 개의치 않는 자유와 용기가 필요하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따라서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하고 자랑스럽고 즐거운 것이 없다는 확고한 기독신앙을 가져야 한다. 다시금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하자. 그리하여 예수님으로 물들어가는 식구들이 되시길 바란다.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찬송가 144장)
 
오늘의 기도

아름다운 주 하나님, 늦은 가을 단풍잎들을 보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란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우리 가족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인생의 겨울과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참으로 아름답고 고운 주님으로 물들어가는 가정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용희목사 / 이태원제일교회



화-성공을 원하는가?
본문: 빌립보서1:27-29
찬송가: 543(구342)

'성공학'에 관한 책을 많이 출판해서 그야말로 성공을 거둔 출판사가 있다. '나이팅게일 콜란트'라는 주식회사이다. 누군가가 그 회사 회장에게 물었다. "성공에 관한 수많은 책을 출판하셨는데, 과연 사란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자세(attitude)와 목표(goal)입니다." 환경에 대처해 나가는 태도와 그리고 목표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좋은 환경을 바란다. 그러나 좋은 환경이 꼭 성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이 성공을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된다. 역사적으로 이름깨나 올릴만한 인물들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우한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부모님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불우했던 과거와 자신의 부모를 자랑스러워한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이 되어 첫 연설을 할 때이다. 반대정파의 한 의원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했다. "내가 지금 신고 있는 구두는 당신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요. 그런데 구두수선공의 아들인 당신이 우리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단 말이요?" 링컨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의원님께서 오늘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분을 추억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위대한 구두수선공이셨습니다. 저는 그분을 존경합니다. 혹 의원님의 구두에 문제가 생기실 때는 제게 가져오십시오. 우리 아버지의 기술에는 어림없지만 정성껏 제 아버님을 대신헤서 구두를 수선해 드리겠습니다."
 
문제는 환경과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고난이 없는 인간은 없다. 불신자들도 부단한 도전과 인내로 환경을 이겨나간다. 실패했다가도 재기(再起)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그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환경을 탓하고 염려만 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 구할 바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목표의식도 대단히 중요하다. 성공을 이루는 데 있어서 동기부여가 된다. 우리에게 목표는 무엇인가? 장로님 한분이 도교육청 사무관 시험에 합격하셨다. 시험 전 필자기 질문한 것이 하나 있다. "승진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였다. 그분의 대답은 단호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그리고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한 목적이 그를 분발하게 했다. 지치지 않게 해주었다. 단순히 잘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말자. 거룩한 목표를 세우자. 하나님이 기뻐하실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자.
 
성공을 원한다면 환경을 탓하지말라. 주저앉지도 말라. 환경에 굴복하지 말라. 힘들 때 기도하자. 주님이 함께하실 것이다. 그 길이 성공의 길이다.
 
오늘의 기도
 
주님,우리로 약하여 환경에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도하며 이겨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원일목사 / 선한교회 



수-주안에서 누리는 희망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4: 13-18
찬송가 : 435장(구 492장)
 
때를 알아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만큼이나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새 천년이 지난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낡은 정신과 타성에 젖어 갈등을 일으키는 지도자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때를 아는 것에 대하여 시대착오의 잠에서 깨어날 것(롬3:11)을 당부한 말씀에서 보듯이 지도자는 시대를 지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은 지도자를 종이나 머슴으로 비유하며 섬김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시대는 국민을 우롱하는 머슴들이 비난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종 또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불을 준비한 열 처녀의 비유에서 보듯이 때를 안 다섯 처녀와 그렇지 않은 다섯 처녀의 이야기는 준비없는 삶을 살다가 실패하여 후회하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재림은 우리들에게 선한 삶의 결단을 요청하고 있다.
 
때에 대한 가르침 중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날은 이미 사모할 날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다(암 15:18-24). 슬기롭지 못하여 때를 망각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제사의 노래도 비파의 소리도 내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문은 잠자는 자의 이야기를 통해 때와 결단을 촉구한다.
 
외국영화의 장면 속에서 무덤의 묘비를 보면 'OOO여기에 잠들다'라고 쓴 것처럼 죽음을 잠든다로 표기하면서 끝이 아님을 말하고,성서가 적용되지 않는 세계에서도 영혼불멸을 운운하면서 죽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믿음으로 바라보는 지금에 대해 성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은 마지막 때의 심판과 더불어 죽음 앞에서의 희망이다. 주와 항상 함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음관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 결단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아야 하고,둘째 형제 사랑하기를 그치지 말고 누구도 궁핍하지 않게 해야 하고,셋째,참된 소망의 삶을 살아 죽음을 뛰어 넘는 희망을 간직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 시대를 일컬어 전환기의 시대와 새 물결의 시대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옛것에 매달리고,자기 것에 목숨 걸고,심지어 죽은 자 앞에서도 자신은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다.
 
말씀은 죽음을 뛰어 넘어 있는 내일의 소망을 위해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 하신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살전 4:1)"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자.
 
오늘의 기도
 
새로운 오늘은 주신 것 감사합니다. 주와 함께 호흡하며 새로운 결단의 시간을 갖게 하심 또한 감사합니다. 오늘이 바로 내일을 알게 하는 소중한 때임을 깨닫고,맡은 일에서 성실히 하나님께 충성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수택목사/새나루교회



목-청교도인들의 추수감사
출 23:14-17
찬송가 589장(구 308)
  
명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자기백성인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무교병의 절기와 맥추절과 수장절,세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먼저 무교병을 먹는 유월절은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구원을 얻은 날이다. 이날은 여호와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매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였다. 둘째,맥추절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둬들인 때에 지키는 절기이다. 수장절은 1년 농사를 거둬들인 후에 드리는 절기인데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는 하나님께 1년 동안 지켜주시고 입혀주시고 먹여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는 절기이다. 이 땅에 그러한 감사는 항상 있었지만, 특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청교도인들의 추수감사는 더욱 본받을만 하다.
 
첫째,풍성한 감사제였다.

1620년 4월 5일 1백2명의 청교도인들이 영국성공회와 권력자들의 핍박을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향했다. 영국의 사우스햄톤을 떠나 55일 항해 끝에 플리마우스에 정박하고 그 후 1년 동안 땅을 개간해서 농작물을 심고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나누며 거둬들인 곡식을 모아 놓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추수감사절예배를 드렸다.
 
그들의 감사에는 독특한 것이 있었다.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동료들이 죽었고 질병과 영양실조로 죽기도 했으며 공동숙소는 불에 타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드리는 추수감사예배야말로 진정한 감사제였다.
 
둘째,양심의 자유와 경제적 번성의 감사였다.
 
청교도인들은 언제나 양심의 편에 서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바로 그들이 의롭다는 것을 입증한다.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양심을 위해서 감옥에 들어가는 편을 택했다. 부패한 교회에 남아있기 보다는 양심의 자유를 위해 고난과 영국교회에서의 분리를 택하고 미국으로 갔다. 그들은 양심의 자유와 경제적 번성을 위해 하나님께 예배하며 감사했다.
 
셋째,플리머스 법을 만든 감사였다.
 
청교도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플리머스 법을 만들었다. 청교도인들이 이 땅에 양심이 다스리는 나라,성경대로 사는 나라를 세우려고 플리머스 법을 만들었다.
 
미국의 헌법은 플리머스 법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플리머스 법을 확대해 놓으면 '주'법이 되고 주법을 확대해 놓으면 연방법이 된다. 연방법을 확대해 놓으면 유엔법이다. 이러한 법을 만든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했다. 좋은 법은 좋은 백성을 만들고 나쁜 법은 나쁜 백성을 만들고 나쁜 나라를 만든다.
 
청교도인들은 신앙 양심의 법과 성경을 실천하며 살았다.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오늘의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1백2명 청교도인들이 신앙의 양심을 따라 미국땅으로 이민을 떠나 살았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케 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들도 청교도들처럼 풍성한 감사,양심의 자유와 번영의 감사,좋은 법을 만드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기식목사 / 아산동산교회



금-성령으로 충만함을
본문 : 에베소서 5 : 15∼21
찬송가 : 191장 (구 427)
 
성경의 기록 가운데 놀랄 만한 일은 예수님도 성령 충만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죄가 없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으며 능력을 행하셨다. 하물며 육신의 욕심에 이끌리는 우리는 더욱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고 저절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 것이라고 자만해서는 안된다. 일생동안 예수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던 사도 바울도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일하시지만,성령은 하나님이시요 우주보다 큰 분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성령께 잠기는 것이요 성령께 사로잡히는 것이다. 스펀지가 물에 잠기는 것과 같다. 스펀지가 물에 잠기면 스펀지는 물로 충만하다. 그러나 실상은 스펀지가 물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을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말씀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다. 성령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다. 결코 성령께서 독자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고,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알 수 있고,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우리 삶의 핵심가치와 목표로 삼을 수 있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우리가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이 되기보다 성령의 은사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당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지만,우리가 섬기는 일을 할 때 그 은사가 나타난다. 섬기는 일과 상관없을 것 같은 방언의 은사도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우리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우리 마음은 불평과 비난 대신 찬양과 감사가 넘친다. 성령 충만을 통해 우리는 불이익과 박해를 인내할 수 있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영광과 칭찬에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를 둘 수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성령께 순종하게 하옵소서. 성령을 종처럼 여기지 않게 하시고,저희를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에 합당한 자로 세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권대근목사 / 동산교회



토-욥의 아내를 통한 교훈
본문: 욥기2:7~10
찬송가: 342(구 395)
 
현실의 어려움이 닥칠 때 욥의 가정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욥의 아내를 통한 교훈은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하다. 욥의 가정에서 우리 가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첫째,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였다. 이는 현실적인 고통에 동참한 모습이다. 욥의 아내로서는 힘들고 어려운 현실이 된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 하나님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사탄에 의하여 신앙의 눈이 멀어 하나님의 일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불신앙의 언어를 표현한 것이다. 남편과는 달리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할 수만 있으면…"이라고 했을 때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고 하셨고 이때 외친 말씀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이다. 믿음과 믿음 없음이 동시적으로 공존한다. 이 차이는 작은 것 같으나 엄청나다. 우리는 나의 믿음이 내리막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며 절대 믿음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내 숨결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이는 욥의 아내가 고통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숨결을 느끼는 거리에 있음은 아내가 욥의 고통의 자리에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고통의 현장에 머무르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부의 관계는 친밀한 거리 그 이상이다. 욥의 아내가 남편을 저주하였으나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맺어진 부부의 연을 굳게 지키며 함께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끝까지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한다.
 
셋째,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다. 이는 마침내 영광의 기쁨을 함께 받은 것이다. 욥의 가정을 말할 때 아내의 말은 숨겨져 있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사라가 등장하지 않음과 같다. 즉 하나님의 뜻을 묵묵이 받아드리며 인내로 살아온 신앙인의 모습이다. 욥이 말년에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함으로 그를 기쁘게 받으시고 처음보다 더 복을 주셨다고 하심은 이로 인하여 고난의 과거에서 하나님의 복을 회복받은 것이다. 믿음이 적은 욥의 아내가 역경의 날들을 참고 견딘 자가 됨으로서 욥과 함께 은혜와 복을 받은 것이다. 이는 고난 가운데서 성도가 믿음을 굳게 지켜 인내함으로 주와 함께 영광의 기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고난 중에도 끝까지 견딤으로 주와 함께 왕 노릇 하는 복을 받는다(계20:4). 황혼의 이혼이 많아져 가는 이때 신앙인의 가정은 크게 교훈을 삼아야 한다.
 
현실의 고통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고도 끝까지 견디는 자가 됨으로 하나님이 회복하여 주시는 복으로 기쁨을 누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시길 바란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우리의 가정들이 무너져 가는 현실 속에서 욥의 아내를 통한 교훈을 생각하며 시련과 고통의 현실에서도 가족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며,믿음의 가정을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을 기억하여 모든 시련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광재목사/남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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