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으로 배고픔은 더욱 깊어지고...

내전으로 배고픔은 더욱 깊어지고...

[ 연재 ] <나눔과섬김> 세계의 절반이 배고픈 이유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1년 07월 26일(화) 19:28

아프리카의 르완다 내전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한 한 호텔 지배인의 노력을 영화화한 '호텔 르완다'. 이 영화에서는 아프리카의 내전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지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실존인물 폴 루세사바지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 '호텔 르완다'의 배경은 1994년 르완다 사태다. 21세기 최대의 비극으로 불리는 르완다 사태는 국민의 다수족인 후투족(85%)과 소수족인 투치족(14%) 간의 갈등으로 죽고 죽이는 참사 끝에 1백50만 명이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르완다의 종족 갈등은 벨기에 군대가 수도 키갈리를 점령하고 위임통치령을 시작한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벨기에는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투치족과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펼치는데 다수인 후투족을 고립시키고, 소수인 투치족을 우대해 식민통치의 말단 관료집단으로 삼는다. 아프리카의 독립국가 붐 이후 벨기에 신탁통치 기간에도 투치족은 후투족의 지도자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고, 이에 반발한 투치족이 폭동을 일으키는 등 무장대립이 일어나게 된 것. 이후에도 르완다는 1962년 완전 독립 후 강제 추방된 부룬디의 투치족이 이듬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면서 엄청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 종족갈등은 1994년 4월6일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테러 공격에 의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후투족의 복수로 본격화됐다. 곧바로 후투족은 4월 9일부터 11일까지 단 3일동안 2만명의 투치족을 학살했다. 1990년에서 1994년까지 르완다 국민 8백14만 명 중 약 1백50만 명이 학살될 정도로 엄청난 학살이 자행됐다.

# 르완다 참극으로 나라 기능 마비

종족간의 참극으로 인해 르완다에는 40만 명의 고아와 50만 명의 미망인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과 여자 아이들은 르완다 육군(Rwandan Armed Forces, 'RAF')을 비롯한 군인들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이러한 성폭력은 에이즈 전염의 또 다른 수단이 됐다.
 
또한, 공포로 인해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했다. 약 2백50만 명이 인근 다른 나라로 피신을 갔다. 이들은 인접국인 자이르, 탄자니아, 부룬디 등의 난민수용소로 분산수용됐다. 그러나 정신적 충격과 영양실조, 말라리아, 장티푸스, 에이즈 등의 질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 1994년 7월 한달동안 자이르 고마 난민촌에서만 4만3천명의 난민들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다.
 
르완다인들이 겪은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당시 주변국 부룬디와 자이르의 내전이 더욱 악화되어 이 나라에 대량 유입된 르완다 난민들은 내전에 휩쓸려 수십만 명이 학살됐다. 르완다 난민들은 피난 및 이동과정에서 학살됐다. 1997년에는 자이르에서 귀환 중이던 르완다 난민 20만 명이 한꺼번에 행방불명되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로 대량학살은 공공현히 자행됐다.

# 전쟁은 가아 사망자를 양산한다

최근 1백년간 아프리카 도처에서는 내전이 빈번히 발생해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기아에 처하게 됐다. 내전은 수단 남부, 라이베리아, 킨샤사, 브라자빌, 앙골라, 차드, 부룬디, 시에라리온 등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곳에서 발생했다.
 
전세계적으로 외부의 식량원조가 필요한 정치난민 2천5백만 명 중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의 난민 캠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난민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전쟁으로 인해 집과 논ㆍ밭, 가축을 잃고 고향을 등졌지만 국경을 넘지 않고 사는 실향민의 숫자도 3천만 명이 넘는다. 이중 절반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1970~1999년 사이 아프리카에서만 43차례의 전쟁이 벌어졌고, 이 전쟁은 심각한 기아를 초래했다. 아프리카 인구는 세계 인구의 15% 정도다. 그러나 전세계 기아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아프리카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지를 나타내준다.
 
전쟁이 일어나면 도로가 끊기고 국제 원조단체의 물자는 운송이 되지 않아 기아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1998년 앙골라 남서부 우암보에서 수도 루안다로 원조물품을 싣고 이동 중인 유엔 소속 C-130 수송기는 도착 지점 40km를 앞두고 반군 세력에 의해 격추됐다. 이 비행기에는 유엔 직원 등 14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앙골라의 내전으로 40만 명이 넘는 실향민들은 유엔의 식량지원에 의존해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이 수송기의 격추로 인해 차기 수송 계획도 차질을 빚어 실향민들은 더욱 심각한 기아 속에서 사망자들이 속출하게 됐다.

# 기아를 무기로 삼다

내전을 경험하는 나라의 정부 혹은 반군들은 국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식량을 의도적으로 끊는 일도 있다. 말하자면 기아를 무기로 삼는 셈이다. 이러한 악행의 대표적인 예가 1992~1995년 벌어진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이다. 당시 세르비아 공화국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이끌던 세르비아군은 보스니아ㆍ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 시민과 그 지도자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시가지를 완전 봉쇄해 식량을 차단했었다.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 대통령도 1996년 수천 명의 적대세력을 포위해 그 안의 사람들을 굶어죽게 만들기도 했다. 이 내전 중 라이베리아 국민 50만 명이 죽었다.
 
수단에서도 이슬람 정권 지도자인 하산 투라비는 내전을 피해 남부 수단과 다르푸르 지방에 피난해 있는 농민과 유목민을 압박하기 위해 구호단체의 비행기가 지나가면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만행으로 수많은 실향민들이 극심한 기아를 겪어야만 했다.

# 선진국은 책임있는 자세로 임해야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아프리카의 수많은 내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들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중동에서 일어났던 '자스민 혁명'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중동은 엄청난 석유 매장량 때문에 서구 강대국의 경제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아프리카의 내전은 선진국들의 경제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르완다에서 1백50만명이 죽어가던 그 엄청난 참극 속에서도 서구에서는 언론보도도 많지 않았고, 심지어 유엔 안보리에서도 눈과 귀를 막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르완다 종족 갈등의 시작은 벨기에의 분리주의 식민정책 때문이었으며, 소말리아, 토고, 우간다,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기니,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 등 수많은 내전의 뒤에는 서구 열강들의 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 전세계 기아에 대한 책임에서 서구 열강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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