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목회 첫 예배의 눈물

한인목회 첫 예배의 눈물

[ 디아스포라리포트 ] 필리핀 주빛교회 편 3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10월 27일(수) 16:24

 
최근 필자는 한인 디아스포라운동에 뛰어들었다. 다른 한인교회들을 통해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건강한지 확인하고 싶었고 다른 한인교회들의 상황을 알고싶어서였다. 2003년 10월 타문화권 사역에서 한인목회로 사역을 전환하고 첫 예배를 드리는데 눈물이 났다.
 
지금까지 그 어떤 결정에도 한마디 안 하시던 필자의 멘토 목사님도 "꼭 한인 사역을 해야 하는가?"하고 여운을 남기셨다. "현지선교회에서 결정한 일입니다"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그 질문의 의도를 알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까지도 한인교회 목회자는 선교사가 아니라는 의식이 팽배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 여파는 생각보다 심했다. 당장 선교비 후원을 끊는 교회도 있었다. 그렇다고 당시 우리교회의 지리적, 목회적 형편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다. 매주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려면 땀을 뻘뻘 흘리며 교회를 찾아와야 했고, 주택가 한복판에 위치한 교회를 찾지 못해 돌아가는 교민들도 있었다.
 
강단에 엎드렸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교인 50명이 모이면 교회를 이전하고, 교인 1백 명이 모이면 선교하겠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그렇게 목회하던 2005년 말 안내를 서던 청년이 다가와 "목사님, 의자가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교회 의자는 70여 개였는데 참석한 성도가 67명이었다. 그날을 계기로 교인들은 회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교회 이전을 결의하고 모든 권한을 담임목사인 필자에게 일임했다.
 
그날부터 필자는 밤낮없이 새로운 교회당을 찾아 나셨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은 우리들의 안식처를 허락해 주셨다. 지역 시세의 3분의 1도 안 되는 월세에 전기요금까지 포함한 저렴한 곳이었다.
 
분명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건물 주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동차 판매로 사업을 키웠으며, 직원들도 아주 친절했다. 한번은 계약금을 낮추기 위해 찾아갔더니 부사장이 "어떻게 하면 시험을 이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복음을 설명했고, 그 부사장은 "내가 이 계약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돈 이야기를 하러 갔는데 부사장에게 복음을 전하게 됐고, 결국 하나님은 그를 통해 적은 비용으로 계약을 채결하게 하신 것이다. 곳곳에 사람을 배치시키시고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2006년 6월 첫 주, 많은 분들의 기도와 헌신을 통해 한 달 간의 내부 공사를 마친 후 성물을 새로 구입해 입당예배를 드렸다. 때마침 2006년에는 많은 이민자들이 필리핀을 찾았고 교회는 얼마 후 곧 1백명을 넘어섰다. 이후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제자훈련이 시작되었다. 교회 자체적으로 큐티집을 만들어 자발적으로 큐티를 하고 매주 소그룹별로 제자 훈련을 시작했다.
 
한참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즈음에 필자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어느 토요일 밤 늦게까지 설교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눈에 모래가 들어간 느낌과 함께 눈이 아파 잠을 잘 수 없었다. 2~3시간 동안 세수도 하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었으며 마지막으로 눈에 따뜻한 수건을 놓고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병명은 안구 건조증이었다. 두 번째는 어느 날 아침에 배가 아파 일어 났는데 통증이 매우 심했다. 가까이에 있는 집사님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달려 갔다. 진통제를 맞고서야 겨우 참을 수 있었는데 그날 저녁 제자 훈련까지도 통증은 계속됐다. 나중에 밝혀진 병명은 요로결석으로 다시 두 달 반을 고통 속에 지내야 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살고 교회는 목회자의 피와 땀을 통하여 성장한다는 것을 몸으로 경험한 때였다. 이렇게 교회는 조금씩 목회자와 함께 성장하며 건강해 지고 있었다.

임장순/필리핀 주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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