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교회와의 대결

예루살렘 교회와의 대결

[ 연재 ] 사도바울행전I.<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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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5월 26일(수) 15:50
   
▲ 예루살렘 성벽의 일부.

스데반의 순교 결과 예루살렘에서는 교회에 대한 큰 박해가 일어났다. 바울은 그 핍박에 앞장섰다. 훗날 그는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갈 1:13)하는 말로 고백하였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1~3).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큰 박해 때문에 수많은 교인들은 도시에서 쫓겨나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교회는 쇠퇴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각 지역에 전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행 8:4~6).

순교한 스데반과 같은 헬레니스트이며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던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남하하여,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 이르렀다. 거기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관리인 내시를 만나 세례를 주었다. 빌립의 전도 활동은 끝날 줄 몰랐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행 8:40).

교회에 대한 큰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난 나사렛 예수의 교인들 대다수는 시리아의 독립 도시 다메섹에 갔다. 오늘날 시리아 공화국의 수도인 다메섹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 일찍부터 수많은 유대인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다메섹의 지배자는 아레타스 4세(주전 9~주후 40)로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피난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새로운 전도 활동은 다메섹의 유대인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다.

청년 바울은 이 다메섹에 눈독을 들였다. 이 도시의 교인들의 활동을 반드시 저지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로마 정부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도망 범인에 관해서는 예루살렘 대제사장이 범인 인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있었다. 그 권리는 마카베오 왕조 때부터 예루살렘 대제사장에게 주어졌었다.

"그러므로 만일 유다 나라에서 악질분자 노릇을 하던 자들이 당신 나라에 피신하거든 대제사장인 시몬에게 넘겨 그가 자기네 법대로 그들을 벌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마카베오 상 15:21)

청년 바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범인 체포 요구서를 발행해 달라고 하였다. 나사렛 예수의 무리를 찾는 대로 남녀 구별 없이 체포해 오기 위해 성전 경호병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 9:1~2).

김희보/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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