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24일

4월 19~24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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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15일(목) 14:47

월-원칙을 지키는 사람
본문: 창 39:1-5, 19-23
찬송가:413장(구 470장)

갈등(葛藤)이란 칡과 등나무가 얽히듯이 까다롭게 뒤엉켜 있는 상태로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원칙대로 선택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갈등하게 마련이고 불행해진다. 그러면 어떤 원칙을 지키며 살아야 할까?
 
첫째, 신앙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과 우리는 언약의 관계이다. 이것이 성경에 가장 잘 드러난 예가 하나님과 우리가 혼인관계로 설명된 호세아서이다.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들이 다른 이성에게 마음을 줘선 안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어떤 것도 들어서지 않게 해야 한다.
 
둘째, 성적인 유혹 속에서 원칙을 지켜야 한다. 요셉의 경우 보디발의 집에서 고된 종살이를 했다. 그 환경 속에서 좀 더 편하고 쉬운 길을 택하려면 여주인의 유혹에 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혹이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기에 요셉은 단호하게 원칙을 지켰다.
 
셋째로, 신의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요셉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들마저 포용했다. 형제들을 끌어 안았고, 자신에게 기회를 준 보디발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고, 감옥의 간수장도, 애굽의 바로에게도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런 요셉을 칭찬하고 인정할 때,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호와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고, 요셉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갈등하지 않고 평화와 행복을 만들어 간 사람이 되고 싶다면 원칙을 지키며 살자.

오늘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마음을 성령으로 채우지 않고, 입에 독을 머금고 살며 고난을 자초하곤 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그날을 꿈꾸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 종 찬 목사
고창중앙교회 시무


화-새 하늘과 새 땅을 보라
본문: 벧후 3:8-13
찬송가: 179장(구 167장)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월드 개장식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한 축사자가 "월트 디즈니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런데 다음 사람이 "월트 디즈니씨는 이미 오늘의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축사자의 말을 수정했다. 월트 디즈니는 미래를 본 사람이었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지식이 중요하다. 미래는 현재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해 준다. 그리고 이 결정이 다시 내 개인의 미래를 결정해 준다. 미래가 이렇게 중요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데에 우리 모두의 고민이 있다.
 
미래학자들이 말하는 미래는 대체로 성장의 신화에 근거한다. 이 성장의 신화는 진화론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막시스트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빌어서 역사의 무한한 진보를 말하기도 한다. 역사가 무한히 발전하면, 유토피아가 온다는 것이다.
 
반면 성경은 최종적인 미래 곧 역사의 끝에 주의 날이 올 것을 말한다. 주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소멸되고, 땅에 있는 모든 물질이 다 녹아 없어진다는 것이다. 끝이 있고, 그 끝은 매우 참혹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만 말하지 않는다. 심판으로 모든 것이 끝나면, 의는 있지만, 복음은 없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 새로운 시작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바로 복음이요, 성도의 근원적인 소망이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자.

오늘의 기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맹렬한 심판을 받지만, 동시에 새하늘과 새땅이 임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세상에서의 환난과 핍박을 능히 견디게 하옵소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 대 석 목사
일산소망교회 시무


수-용서와 회복의 은혜
본문: 요 21:15-17
찬송가: 135장(구 133장)

단판승부는 깨끗하긴 하나, 너무나 허무하다. 가능하면 한 번쯤은 더 기회가 주어지고 다시 도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신앙에는 관용과 용서를 통한 새로운 기회가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오셨다. 주님은 그에게 거룩한 기회, 사명을 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용서하심으로 그가 있어야 할 자리로 찾아가게 하셨다. 주님께서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지금 베드로는 다시 갈릴리의 물고기 잡는 어부가 되었다. 베드로가 비록 배반과 실패의 자리에 빠졌지만,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으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의 가정에도 실패와 실수, 허물로 인해 방황하는 가족이 있다. 그에게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베푸신 관용이 베풀어진다면, 가족으로써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에게 특별한 관용과 격려를 하신다. 주님이 베드로를 찾으셨듯이, 우리도 그를 다시 돌아보며 새로운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도 베드로처럼 가족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자기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그리할 때, 우리 가정에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맡기신 각자의 역할과 직분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믿고 섬기기를 원하신다.
 
천국은 겸손과 섬김, 관용과 용서를 기초로 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이 땅에서 그런 것들을 연습함으로 천국에 다가서는 것이다. 천국시민은 가정에서부터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가정에 용서와 섬김으로 하나님의 복과 은총이 넘치기를 축복한다.

오늘의 기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에 서로를 향한 관용과 사랑이 있게 하옵소서. 용서와 격려로 하나되는 가정을 이루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 길 홍 목사
반포교회 시무


목-이 땅에 관하여
본문: 사 24:1-13
찬송가: 488장(구 539장)

이사야서는 우주적 심판을 다루고 있다. 이사야 24장부터 27장까지 넉 장을 보면 하나님이 온 세상, 즉 이 땅을 뒤흔들어 놓으시는 것을 보게 된다. 지구 전체, 아니 온 우주적 심판을 단행하신다. 그래서 세계 민족들이 쇠잔해지고 하늘의 군대가 벌을 당하고 사망이 폐지되고 리워야단이라고 불리 우는 용(사탄)이 심판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땅을 공허하게 하신다. 땅이 공허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율례가 깨어졌기 때문이다.(24:5) 이것은 이 세상의 기초가 무엇임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이 견고한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의 말씀이 무너지면 이 세상은 흔들리고 공허로 되돌아가 버린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가 다시 세워지기 위해서는 죄악이 마감되어야 한다. 그래서 단순히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것으로 끝을 내지 않고 죄의 근본인 원수 마귀의 종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의 군대를 벌하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고 용으로 불리 우는 사탄을 심판하시는 것이다.
 
셋째, 심판이 끝난 후에는 잔치가 열린다. 성도들은 즐거이 노래 부르고 눈에서 눈물이 씻겨질 것이며 수치도 벗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날이 이루어 질 때까지 인내하며 견고해야 한다. 주님만을 의뢰하며 평안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오늘의 기도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하나님! 주께서 마귀를 온전히 멸하시고 사망을 폐하시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켜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현 진 목사
초읍교회 시무


금-주님을 사랑하는가?
본문: 마 22:34-40
찬송가: 314장(구 511장)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흔히 개는 뼈다귀를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는 나의 욕심으로 인해 대상에게 어떤 피해가 있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이기적인 욕구가 있다. 반면 사랑한다는 의미는 희생과 인내 섬김 등의 의미가 들어있다.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자기희생과 봉사와 섬김의 대가를 기꺼이 치른다. 내 이기적인 욕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함에 따라서 기꺼이 치루는 희생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되는 계명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좋아하고 있는가? 만약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주를 위한 모든 희생과 섬김이 기쁨일 것이요. 좋아하는 것이라면 내가 기도하는 것 바라는 것이 성취되어야 기쁠 것이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나의 목표와 기도제목 그리고 소원을 스스로 정해놓고 주님께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이루어주시라고 주님을 따라오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표현의 정점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심으로 인해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오늘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주님을 좋아하고 있는가? 내가 주님께 드린 것들이 주님을 좋아해서 드린 것이었다면 이 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요구하지도 말고 주님만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오늘의 기도

주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죄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했던 웨슬리의 기도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 요 셉 목사
시화염광교회 시무


토-종이 아닌 형제라
본문: 몬 1:13-22
찬송가: 559장(구 305장)

빌레몬서는 종과 주인의 관계를 새롭게 말씀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종은 짐승과 같은 노예였다. 그러나 바울은 노예가 아닌, 형제라 부른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16절) 파격적인 생각이다. 주안에서 바라볼 때 노예도 형제가 된다. 당시에 종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가능하다.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종도 형제로 보인다.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보인다. 가족을 예수님 안에서 바라보자. 맘에 들지 않을 때에도, 예수님 안에서 보면 새롭게 보인다.
 
바울은 빌레몬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14절에서 바울은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신앙이 좋을수록 예절을 잘 지킨다. 믿음이 있다고 함부로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중하다. 그래서 억지가 아닌 자의로 하게 한다. 또한 바울은 책임이지는 사람이었다. 18절에 오네시모가 너에게 빚진 것은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했다. 가족은 그렇게 말해야 한다. 서로를 책임져주자.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자. 가족이 편하다고 쉽게 말하지 않고 예절을 지키자.
 
21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이 순종할 것을 확신했다.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 안다고 했다. 가족은 서로를 믿어주어야 한다. 의심하거나 못마땅해 하면 기쁨이 없다. 앞으로 잘 할 줄로 확신하고, 이보다 더 순종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신뢰와 격려 때문이었다. 오늘도 신뢰와 격려로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가족이 되자.

오늘의 기도

오늘도 우리 가정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서로를 예수님 안에서 보게 하옵소서. 서로에게 예절을 더 지키며 책임져 줄 수 있게 하옵소서. 서로를 기대하며 살게 하시고 더 순종함으로 서로 행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 용 섭 목사
가락동교회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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