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 연재 ] 사도바울행전I.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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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1월 13일(수) 14: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바울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지중해 둘레의 여러 도시에는 수많은 유대인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다소에도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주전 171년에 이 도시를 재건하면서 유대인 거주 구역을 만들었다. 그 이래로 적지 않은 유대인이 팔레스틴에서 이주해 왔다.

 

   
▲ 바울의 고향 다소의 전망. '클레오파트라의 문' 부근.

초대 교회 교부 히에로니무스(342~420)는 말하기를, 바울의 조상은 팔레스틴 북부 기스카라에서 살다가 이주해 왔다고 하였다. 기스카라는 갈릴리 북쪽에 있는 도시로서, 그 곳에서 가까운 두로에 의존하는 지방 도시이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농촌의 주민과 수공업자, 상인은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모국을 버리고, 보다 좋은 생활을 구하여 외국에 이주하였다"(E. 로제)고 한다.

특히 갈릴리 지방의 경우 바울의 조상은 베냐민 지파(롬 11:1)로서, 작은 부족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파에서 고립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한편으로 상인으로서, 헬라인들과 적극적으로 교제하였다.

스트라본은 '지리서'에서 "유대인은 이미 모든 폴리스(도시)에 진출해 있었다. 무릇 사람이 살고 있는 땅치고 유대 종족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 또는 그들의 세력이 뻗지 않은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고 기록하였다. 바울은 자기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고후 11:22).

이 경우의 '히브리인'은 단지 유대인 내지 이스라엘 사람과는 다른 뜻이 있다. 그것은 생활 양식 및 기질면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습에 지극히 충실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바울은 자기가 유대교의 전통에 열심인 바리새인이라고 강조하여 말하였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바울은 자기를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행 21:39)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시민'이라는 말이 헬라 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헬레니즘 사회의 도시에서는 시의 행정에 참가하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을 의미한다. 시민은 그와 같은 권리를 가지지 못한 '주민'과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디아스포라로서 외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 대부분은 '주민'으로서, '타관 사람'으로 소외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식구는 '시민'이었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인을 다소로 이주시킬 때 그들에게 헬라 시민권을 준 것으로 학자들은 고증하고 있다.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하고 고백하는 바울의 말에서, 그의 조상이 다소에 이주해 온 최초의 유대인 이주자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게 된다. 따라서 바울과 그의 일가는 다소 시에서 확고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유력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희보/서울장신 명예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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