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주의 영광은(130장)

찬란한 주의 영광은(130장)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3월 10일(화) 09:21

신약 시대 이후 예배 순서에 찬송가가 채용된 것은 4세기 때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서방 교회에서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가 그 선구자이다. 밀라노 교회에서는 현재도 '암브로시우스 성가'를 노래한다.

기독교 신자인 로마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난 암브로시우스는 법률을 공부하고 밀라노의 행정 책임자로 있었다. 그 무렵 밀라노에 아리우스파가 들어와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질이시다"라고 하는 기독교 정통파를 공격하였다.

이단의 공격이 드세게 됨에 따라 밀라노 시민들은 "암브로시우스를 주교로 모시자"라고 소리쳤다. 주교로 임명된 암브로시우스는 교회 안과 밖에서 눈부시게 활동하였다.

이교 부흥을 꾀하는 원로원과 싸웠고, 그라티아누스 황제로 하여금 우상을 철거하게 하였으며, 황태후 유스티나에 맞서서 아리우스파로부터 밀라노 성당을 되찾았다.

특히 테오도시우스 1세가 데살로니가 시민 7천 명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 황제를 탄핵하여 황제로 하여금 참회하게 하였다. 또한 동방 교회의 황제 교황주의를 타파하여, 교회에서 황제는 한 명의 교인일 뿐이라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암브로시우스의 찬송가 창작과 예배 때 찬송가를 부르는 문제는 교회 역사에서 격렬한 논쟁으로 꼽힌다. 당시 로마의 황태후 유스티나가 아리우스파에 가담하여 밀라노 성당을 빼앗고, 교인들과 함께 암브로시우스를 이틀 동안 교회에 감금한 일이 있었다.

"암브로시우스는 교인들의 신앙을 북돋우기 위해 동방 교회의 방식을 따라 찬송가를 함께 불렀다. 이것이 서방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고 암브로시우스의 제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책에 기록하였다.

그 때 부른 찬송가는 암브로시우스가 지은 '테 데움'(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이라고 한다. 이 찬송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도들이 불렀고, 훗날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회의 파문장을 불태우며 개신교 교인들과 함께 불렀다.

암브로시우스가 지은 찬송가가 1백 편이 있다고 말하던 시대도 있었으나, 현재 그가 확실하게 창작한 찬송가는 12편 내지 14편으로 고증되고 있다. 그 찬송가들은 한결같이 "라틴어 가사의 엄격함과 곡의 우아함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를 이루고 있다."

당시 수도원에서는 매일 적어도 세 차례 암브로시우스의 찬송가를 불렀고, 평일과 주일에는 각기 다른 찬송가를 불렀다.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 예배뿐 아니라 다른 의식 때도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찬송가 사용은 마침내 일반화하고 제도화하기에 이르렀다.

암브로시우스는 스스로 찬송가를 창작하고, 아울러 찬송가를 예배 의식 속에 채용하게 하는 중요한 일을 하였다. 또한 훗날 '그레고리오 성가'의 기보법이 된 '8선법 조직'인 '교회 선법' 중 4개 선법을 엮는 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위와 같이 암브로시우스는 서양 음악, 특히 기독교 음악, 그 중에도 찬송가에 끼쳐준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따라서 암브로시우스를 가리켜 '찬송가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HBK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