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한국인 구약학 교수에서 평양신학교 교장이 되기까지

1. 첫 한국인 구약학 교수에서 평양신학교 교장이 되기까지

[ 한국 신학의 개척자들 ] 5. 이성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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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9일(월) 20:23

하 경 택 / 서울장신대 교수ㆍ구약학


   
▲ 이성휘목사
이성휘는 1889년 평북 철산에서 4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봄학기에 평양신학교 임시교수로 임명된다.

1927년 당시 평양신학교 교과담당표를 보면 이성휘는 성서문학 강해를 맡았다. 1925년 한국사람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신학교 전임교수가 된 남궁혁박사를 뒤이어 평양신학교 첫 한국인 구약학 교수가 된 것이다. 그 후 미국에 유학하여 샌프란시스코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여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1928년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귀국후 평양 서문밖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다가 1928년 9월 6일 평양신학교 조교수로 임명되어 교회를 떠났다. 모교인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에서 성경해석을 맡아 강의하다가 1934년 9월에 미국 인디애나 주의 하노버(Hanover) 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평양신학교는 1938년 가을학기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진리를 굽힐 수 없다는 신념으로 문을 닫는다. 1940년 2월 다시 문을 열기까지 무기한 휴교에 들어간 것이다.  교단의 유일한 교역자 양성기관이 문을 닫게 되자 서울에서는 '선교사의 통제와 간섭에서 벗어난 한국인의 손으로 세워진 신학교' 설립에 뜻을 모았고, 1939년 제28회 총회를 통해 조선신학원 설립이 인준되어 장로교 안에 두 개의 신학교가 양립하게 된다.

이 시기에 아들 이세열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성휘는 평양 근교의 자산이란 곳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된다. 이성휘는 그곳의 자산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섬기면서 농사일과 특히 목수일로 소일했다고 한다. 평양신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1940년 2월에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다시 문을 열게 되었는데, 이때에는 이성휘박사가 교수로 활동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성휘는 8ㆍ15해방을 맞은 후 다시 서문밖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평양노회사, 3백25쪽).

해방이 되면서 평양신학교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되고 신학도 양성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이북 5도 연합회에서는 평양신학교를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일제 때 교장이었던 채필근목사는 친일파라는 죄목으로 감금되고 12월에 새로운 신학교육의 중임을 띠고 김인준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가지 못하고 평양신학교는 공산정권의 기독교 탄압정책 때문에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공산정권은 1946년 11월 19일 당시 교장이었던 김인준목사를 검거하여 문초한 후 일단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이듬해 1월 17일 소련군 특수부대가 연행하여 시베리아로 유배시켜 마침내 순교하게 했다.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신학교를 어용기관으로 삼으려는 공산정권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에서다. 전쟁을 준비하기에 광분했던 북한 공산정권은 신학교 교사도 압수하여 6ㆍ25를 계획할 전쟁준비기관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평양신학교는 부득이 교사를 그 옆의 마포기념관으로 옮겨야 했다.

이 건물은 한국순교의 원훈(元勳)인 마포삼열(Samuel A. Moffett)목사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 평양 경창리(景昌里)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사용할 수 없다고 함으로 또 다시 그 옆에 위치한 서문밖교회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성휘교수는 1947년 1월 20일 평양신학교 교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성휘박사 교장시절의 교수진은 각 노회에 한 명씩 파송을 위촉하여 구성되었는데, 최지화, 김태복목사가 전임으로 가르쳤고, 이학봉(평양 남문밖교회), 박경구(황해도 장연 서부교회), 강문구(평양 경창문밖교회), 김영윤(황해도 안악읍교회) 등이 출강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해방 후 남한에서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던 선교사들이 하나씩 돌아오면서 선교부 사업이 차차 안정을 찾아간 반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으므로 선교사 입북이 용이치 않았다. 미 군정청의 특별 교섭으로 방위량(W. N. Blair) 선교사가 1947년 4월에 평양을 방문했는데, 당시 재학생이 1백46명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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