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예배 ] 2024년 8월 20일 드리는 가정예배
정경환 목사
2024년 08월 20일(화)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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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1장 17~18절
▶찬송 : 16장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극진한 환대(17절, '기꺼이 영접하거늘')를 받고,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의 집에 머물게 된다(16절). 그 이튿날 일행과 함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나는데, 기록자 누가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18절)" 이 표현은 잘 안 쓰는 표현이다. 세상에는 없는 표현이다. 보통은 이렇게 쓸 것이다. "야고보에게 문안하고"
'들어가다'는 '안이나 속으로 가다', '어떤 단체, 기관, 조직의 구성원이 되다', '시작되다', '비용이 쓰이다(치료비가 들어가다)', '어떤 무리에 속하다(곤충류에 들어가지 않는다)', '무엇을 알아차리다(머리에 쏙쏙 들어가다)' 등에 쓰이는 동사다.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쓴다면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 (탐욕, 의심, 더러운 귀신이) 들어가서' 또는 사람에게 사용한다면 성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성경에는 '누구에게로 (들어)가다'는 표현이 가끔이지만 사용된다.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막5:13)",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잠2:19)",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본문에서는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을 만날 때 조심스럽게, 귀하게, 깍듯이,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에는 '조현(朝見: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뵙는)', 또는 '알현(謁見: 지체 높은 이를 만나 뵙는)'과 같다. 일행 중에 한 오랜 제자인 나손을 포함 바울 자신도 적지 않은 나이였음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야고보를 얼마나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는 심지어 미쳤다(막3:21)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단독으로 뵙고(고전15:7) 믿음의 형제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변화되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순교했다. 바울은 그를 교회의 기둥과 같이 여겼고(갈2:9), 교회는 그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낙타무릎'처럼 간절히, 한결같이 기도한 의인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야고보는 자신의 이름으로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1:1)"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 야고보는 예수를 육신의 형이 아니라 주님으로, 자신은 동생이 아니라 종이라고 쓰고 있다. 왕께 나아가듯 겸손히 엎디어 몸 둘 바를 모른 채.
성도는 귀하고 귀하다.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고전12:27). 주께서 생명을 주시고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시는 믿음의 형제를 서로 돌아보고,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며 공감하고, 실족하지 않게, 기분 상하지 않게 하고, 유익하게, 믿음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돼야 한다. 하나님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로, 더욱 사랑하고, 아끼며, 무엇보다 위하여 서로 기도하자.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 되게 하시는 주의 영으로.
오늘의 기도
믿음의 형제를 귀히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소자에게 건넨 냉수 한 그릇까지 기억하시는 주님 앞에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짐을 나누어지며, 덕을 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경환 목사/증산제일교회
▶찬송 : 16장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극진한 환대(17절, '기꺼이 영접하거늘')를 받고,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의 집에 머물게 된다(16절). 그 이튿날 일행과 함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나는데, 기록자 누가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18절)" 이 표현은 잘 안 쓰는 표현이다. 세상에는 없는 표현이다. 보통은 이렇게 쓸 것이다. "야고보에게 문안하고"
'들어가다'는 '안이나 속으로 가다', '어떤 단체, 기관, 조직의 구성원이 되다', '시작되다', '비용이 쓰이다(치료비가 들어가다)', '어떤 무리에 속하다(곤충류에 들어가지 않는다)', '무엇을 알아차리다(머리에 쏙쏙 들어가다)' 등에 쓰이는 동사다.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쓴다면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 (탐욕, 의심, 더러운 귀신이) 들어가서' 또는 사람에게 사용한다면 성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성경에는 '누구에게로 (들어)가다'는 표현이 가끔이지만 사용된다.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막5:13)",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잠2:19)",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본문에서는 나이 어린 사람이 어른을 만날 때 조심스럽게, 귀하게, 깍듯이,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에는 '조현(朝見: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뵙는)', 또는 '알현(謁見: 지체 높은 이를 만나 뵙는)'과 같다. 일행 중에 한 오랜 제자인 나손을 포함 바울 자신도 적지 않은 나이였음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야고보를 얼마나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주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는 심지어 미쳤다(막3:21)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단독으로 뵙고(고전15:7) 믿음의 형제들과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변화되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순교했다. 바울은 그를 교회의 기둥과 같이 여겼고(갈2:9), 교회는 그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낙타무릎'처럼 간절히, 한결같이 기도한 의인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야고보는 자신의 이름으로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1:1)"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 야고보는 예수를 육신의 형이 아니라 주님으로, 자신은 동생이 아니라 종이라고 쓰고 있다. 왕께 나아가듯 겸손히 엎디어 몸 둘 바를 모른 채.
성도는 귀하고 귀하다. 주님의 몸이기 때문이다(고전12:27). 주께서 생명을 주시고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시는 믿음의 형제를 서로 돌아보고,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며 공감하고, 실족하지 않게, 기분 상하지 않게 하고, 유익하게, 믿음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돼야 한다. 하나님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로, 더욱 사랑하고, 아끼며, 무엇보다 위하여 서로 기도하자.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 되게 하시는 주의 영으로.
오늘의 기도
믿음의 형제를 귀히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소자에게 건넨 냉수 한 그릇까지 기억하시는 주님 앞에 겸손히 서로 사랑하고 짐을 나누어지며, 덕을 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경환 목사/증산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