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예배 ] 2024년 8월 5일 드리는 가정예배
정경환 목사
2024년 08월 05일(월)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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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21장 3~6절
▶찬송 : 35장
최종 목적지 돌레마이(7절)를 40km 정도 앞두고 바울과 그의 일행을 태우고 수리아로 항해하던 배는 두로에 상륙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로에 상륙한 이유를 배의 짐을 풀기 위해서라고 말씀한다.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3절)"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서둘렀던 바울 일행은 그 지역 제자들을 수소문하여 만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레를 머문다(4절). 그 시간에 도보로 이동했다면 예루살렘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너무나 여유롭다. 왜일까? 누가는 강조하듯 그 날들을 여러 날이라고 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5절). 무엇이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을까?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참여했던 두로왕 히람,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을 살려달라고 주님께 소리 지르던 여인,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던(행 11:19) 이방의 땅 두로였다. 그리고 제자들, 믿음의 형제들을 수소문해서 찾아야만 겨우 만날 수 있을 만큼 작은 교회(6절)였기에 바울과 그의 일행은 그곳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4절). 여기서 예루살렘은 오늘 본문 바로 앞장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곳(행20:23)'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결박과 환난을 겪을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성령이 막으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 저마다 달라 누구는 이 말을 하고, 누구는 저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성령의 말씀을 듣고 깊이 느끼며, 그 말씀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영적 흉내나 내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겨우 발목에, 무릎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었다. 목과 허리까지 깊이 잠기어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케 하신 것이다.
그들은 바울 일행과 작별할 때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했다.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5절)" 아는 사람 대표 몇 명만 나온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나왔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까지 지참하고 있어 쉽게 표적이 될 수도 있는 믿음의 형제들과 위험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6절). 마치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게 그들을 전송했다. 주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히 2:11) 것처럼 뜨거운고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 일행을 전송한 것이다.
바울 일행이 두로에 머문 이야기 통해 우리는 두로가 더 이상 교만 때문에 에돔의 노예로 팔려 멸망한 도시로, 알렉산더가 정복하기 위해 쌓은 제방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그 기능을 상실한 곳일 수만은 없었다! 그렇기에 '두로에' 상륙한 것이 아니라, '두로에서' 상륙한 것이다. 두로는 그 곳이 경유지가 아니라, 단지 짐을 풀려고 멈추어 선 곳이 아니라, 그 곳에서부터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가운데 설레임으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새로운 시작점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머무는 곳, 그곳이 어떠한 곳이든 어쩌면 '그곳에서'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성령님 우리와 항상 동행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경환 목사/증산제일교회
▶찬송 : 35장
최종 목적지 돌레마이(7절)를 40km 정도 앞두고 바울과 그의 일행을 태우고 수리아로 항해하던 배는 두로에 상륙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로에 상륙한 이유를 배의 짐을 풀기 위해서라고 말씀한다.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3절)"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서둘렀던 바울 일행은 그 지역 제자들을 수소문하여 만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레를 머문다(4절). 그 시간에 도보로 이동했다면 예루살렘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너무나 여유롭다. 왜일까? 누가는 강조하듯 그 날들을 여러 날이라고 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5절). 무엇이 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을까?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참여했던 두로왕 히람,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을 살려달라고 주님께 소리 지르던 여인,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던(행 11:19) 이방의 땅 두로였다. 그리고 제자들, 믿음의 형제들을 수소문해서 찾아야만 겨우 만날 수 있을 만큼 작은 교회(6절)였기에 바울과 그의 일행은 그곳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4절). 여기서 예루살렘은 오늘 본문 바로 앞장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곳(행20:23)'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결박과 환난을 겪을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성령이 막으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 저마다 달라 누구는 이 말을 하고, 누구는 저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성령의 말씀을 듣고 깊이 느끼며, 그 말씀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영적 흉내나 내는, 경건의 모양만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겨우 발목에, 무릎에 머무는 신앙이 아니었다. 목과 허리까지 깊이 잠기어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었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케 하신 것이다.
그들은 바울 일행과 작별할 때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했다.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5절)" 아는 사람 대표 몇 명만 나온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나왔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까지 지참하고 있어 쉽게 표적이 될 수도 있는 믿음의 형제들과 위험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6절). 마치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게 그들을 전송했다. 주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히 2:11) 것처럼 뜨거운고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 일행을 전송한 것이다.
바울 일행이 두로에 머문 이야기 통해 우리는 두로가 더 이상 교만 때문에 에돔의 노예로 팔려 멸망한 도시로, 알렉산더가 정복하기 위해 쌓은 제방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그 기능을 상실한 곳일 수만은 없었다! 그렇기에 '두로에' 상륙한 것이 아니라, '두로에서' 상륙한 것이다. 두로는 그 곳이 경유지가 아니라, 단지 짐을 풀려고 멈추어 선 곳이 아니라, 그 곳에서부터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가운데 설레임으로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새로운 시작점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머무는 곳, 그곳이 어떠한 곳이든 어쩌면 '그곳에서' 또 다른 역사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성령님 우리와 항상 동행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경환 목사/증산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