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소명이다

일은 소명이다

[ 일터속그리스도인 ]

이효재 목사
2024년 05월 23일(목) 08:19
우리는 얼마 전에 제22대 국회의원을 새로 뽑았다. 국회의원은 정치 행위를 직업으로 삼는 전문 정치인이다. 공무원은 직업적 관료로서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공복(公僕)이라는 신념을 갖고 일한다. 반면,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말로는 국민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공적 권력으로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정치인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불신임 받는 대표적인 직업인이다.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Politik als Beruf'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한국 출판사들이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제목을 '직업으로서의 정치' 혹은 '소명으로서의 정치' 두 버전으로 번역했다. 독일어 Beruf에 직업이라는 뜻과 소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 번역 다 가능하다. 저자인 베버는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정치인은 자신의 이익이 아닌 자신에게 권력을 위임해준 국민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책임감으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버가 책 제목에 Beruf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정치에 직업과 소명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음을 가르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Beruf는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일하는 직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에 소명이란 뜻이 추가된 것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경 번역 때문이었다. 그는 고린도전서 7장 20절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의 '부르심'을 Beruf로 번역했다. 루터의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당시 종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교회의 지체가 된 종들에게 종의 직업(Beruf)에 머물며 주인을 섬기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종이라는 직업 또한 그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이라는 뜻이다.

루터의 이런 해석은 단순히 언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독특한 신학에서 나온 것이었다. 루터는 중세 교회를 비판하면서 교회나 수도원의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나님의 소명을 독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믿음에 따라 의로워지는 것처럼(이신칭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소명을 받았다(만인제사장)는 신학적 깨달음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성직자의 일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는 거룩한 소명이라는 '직업 소명론'을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제기했다. 루터의 직업 소명론은 개신교의 교리가 되었지만, 이후 유럽의 세속화 과정에서 교회에서 거의 사라졌다. 지금도 교회에서 소명은 목사나 선교사처럼 직업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종교적 직업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가 살려면 종교개혁 정신과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보존하고 축복하기 위해 우리를 일상의 일터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대리자로 일하게 하신다. 우리는 일터에서 온 세상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청지기이고 제사장이다.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일터에서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전하고, 세상의 제사장으로서 소명에 따라 일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이로써 우리 일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실현하고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번영케 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루터는 우리가 각자의 직업에서 하는 일을 하나님의 '가면'으로 비유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가면을 쓰고 참여하신다. 그래서 우리 일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추위에 떨지 않고, 선한 인간으로 살도록 교육받고, 재난에서 벗어나고, 건강을 회복하고, 평화롭고 질서 있게 살아가도록 도우신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직업적 일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믿는다면, 일의 내용과 태도와 결과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내가 성공하고 싶은 욕망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다. 세상과 사람들에게 해로운 일은 하지 않는다. 사람과 자연을 착취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죄로 여기고 중단한다. 소명으로 하는 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이 생명의 번영을 누리게 하는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므로 소명으로 일하는 그리스도인은 내가 이 일을 하면 얼마를 받을 것인지, 내 목적이 성취될 것인지, 내가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인지를 따지기 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를 생각한다. 소명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의 독특한 교리다. 소명은 한 마디로 내가 아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실제적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일터에서 그리스도인은 나를 이곳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피조물들에게 봉사하는 소명의 사람이다. 우리가 매일 일터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임을 잊지 말자.



이효재 목사 / 일터신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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