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H의 후원과 그 영향 |2015. 07.01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들

한아협 산하 각 시설들은 도시빈민지역이나 농촌에 위치했다. 그래서 늘 시설 설비나 운영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 청계천 지역이나 남양만 지역의 어린이집들은 그 건물 건축이나 운영 모두 KNH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원아들의 점심 제공도 KNH 후원으로 가능했다. 1985년 광야선교원은 KNH 후원으로 원아들의 점심이 해결되면서 선교원 폐원 위기를 한 차례 넘기기도 했다. 탄광지역에 있는…

KNH 결연의 확산과 종결 |2015. 06.15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1974년 첫해 KNH 후원금은 청계천 판자촌 200명의 아이들에게 지원됐다. 청계천 판자촌 사람들이 남양만으로 이주한 후 1977년 356명의 아이들이 KNH의 후원을 받았다. 1981년 한아협이 발족되던 해에는 796명이 독일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아협 발족 이듬해 후원 아동의 수는 1000명을 넘어섰다.  1984년에는 성남제일실업학교를 운영하던 최규성 교장이 지역민들을…

한아협의 사업 |2015. 06.02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불우 아동, 돕고 가르치라

한독아동복지선교협의회 발족에 참여한 구세군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시설들과 기장 동인천 도시산업선교센터의 사업은 주로 도시 빈민과 농촌지역 유아원이었으며, 유아원 시설을 활용한 초등학생들과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방과후 공부방 사업이었다. 구세군후생학원의 후원으로 보육사업이 첨부됐고, 구세군직업훈련원과 성남제일실업학교를 통한 청소년 기술교육과 야학도 있었다. 그러므로 1981년 당시 한아…

작은자후원회의 발족 |2015. 05.25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1985년 산하시설 평가 사전조사 결과에 따라 KNH 루어스 총무는 적극적인 자립대책을 마련하고 교회와 지역사회 자원 동원을 노력 하라고 권면했다. 이러한 권면이 있기 전에 이미 1985년부터 교회와 지역사회 자원 동원은 시작되고 있었다. 1년 동안 얻은 결과가 한아협 1987년 총회에서 보고됐다. 한아협 임원들은 국내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며, 국내 모금을 KNH 후원 회계와는 별도…

국내 모금운동 시작 |2015. 05.12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지극히 작은자 운동'

1985년 9월 황화자 전도사는 한아협 임원들에게 미국 교포들의 후원을 보고했다. 한아협 임원들은 모금액 5%는 후원아동의 특수 상황 대비를 위해 비축하기로 하고 자세한 모금과 사용원칙을 정하기로 했다. 아직 원칙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모금은 계속 진행되었고, 12월에 이미 후원자가 14명이나 됐다.  1985년 9월에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생 김규복, 박진서, 안기성, 유재…

모금 운동의 계기 |2015. 05.06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한독아동복지선교협의회의 모든 사업들은 KNH 후원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아협의 새로운 변화는 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1985년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됐다. 그 곳에서 1983년 한아협의 일을 잠시 접어두고 미국 유학을 떠났던 황화자 전도사는 난지도 쓰레기 집하장 근처에서 목회하다가 별세한 황광은 목사 사모를 만났다. 황화자 전도사는 1968년 장로회신학대학 졸업 후 사역하던 연동교회에서 …

1980년 중반 선교 상황 |2015. 04.21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어린 생명들을 위한 기도

1981년 한아협이 발족된 후 우리나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74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소득은 554달러였다. 그런데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에는 2643달러,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에는 4435달러였다. 1974년에 비해서 국민 총소득이 8배나 증가했다.  또한 대부분의 한아협 산하시설에서 실행되는 유아교육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45…

한국을 위해 기도한 독일인들 |2015. 04.14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한아협이 발족되기 전에는 KNH 루어스 총무가 직접 우리나라에 와서 청계천, 남양만, 동인천, 성남 등 시설들을 둘러보고 후원을 결정했다. 구세군 시설 후원 역시 KNH 루어스 총무와 사령관과의 만남과 그 때를 같이했다. 그러나 1985년 회원교단이 된 기독교대한 감리회 관계자와 KNH의 접촉은 1987년 5월 KNH회장 케일링 박사가 사회선교 국장을 만남으로 이뤄졌다. 그러므로 한아협 발족…

본교단의 한아협 활동 |2015. 04.14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KNH 한국협의회가 발족되기 전 KNH 후원 사업은 대한예수교장로회 농촌부에서 담당했다. KNH 후원으로 운영되는 어린이집 사업은 남양만 간척지, 즉 농촌 지역사회 선교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부 곽재기 총무는 1978년 국제워크캠프 명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부터 도시 빈민지역인 성남시 은행동에 있는 성남제일실업학교에도 KNH 후원이 시작됐다. 이에 따라 1981년 …

한아협 조직의 정비 |2015. 04.14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한독아동복지선교협의회 발족과 함께 조직된 것은 운영위원회였다. 그러나 한아협의 조직 정비는 1984년에 가서야 서서히 진행됐다. 가장 먼저 정비된 조직은 시설장모임이었다. 1984년 2월 27일 각 시설장들은 기독교회관 810호에서 처음 모였다. 여기에 모인 18명의 시설장들은 자립대책을 논의했고, 한아협 사무실 예산안도 검토했다. 10여 일 후 3월 12일 시설장들은 다시 모여 자립 대책을…

초교파 조직의 발족 |2015. 04.14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1981년 구세군 시설에도 KNH 후원금이 지원되기 시작하면서 KNH 후원을 받는 교단은 3개 교단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초교파적인 조직이 필요해졌다.  1981년 초교파 조직인 'KNH 한국협의회(KNH-Korea Council)'가 구성됐다. 이 협의회는 1981년 7월 9일 총회를 가짐으로 공식적으로 발족되었다. 초대 운영위원은 이의호 예장 통합 총무, 동인천도시…

남양만어린이집 운영위 |2015. 04.14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독일 아동후원단체 KNH의 지원이 시작된 지 6년 정도 지나자 KNH 후원을 받는 시설들의 수가 점차 많아졌다. 후원받는 아동들도 1974년에는 200명이었는데, 1979년에는 658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각 시설들은 지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후원받는 시설이 남양만 한 지역에 몰려있을 때에는 KNH 후원과 관련된 일들이 즉각적으로 의논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

섬마을을 변화시킨 어린이집 |2015. 04.14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우도는 제주도 성산포에서 북동쪽으로 약 3.9km 남짓 떨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소가 누운 것 같다고 하여 우도라고 불린다. 섬 전체는 완만한 평지이며, 총 6.6㎢ 정도 된다. 1970년대 우도에는 35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12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초등학교도 있었고, 중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없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개척…

지하실 공부방 |2015. 04.14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남양만 지역 어린이집을 돕던 KNH 루어스 총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외에 다른 교단 탁아사업도 돕고 싶어 했다. 김진홍 전도사는 197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이국선 목사를 KNH에 소개하였다.(김진홍목사 면담, 2014. 5. 29) 이국선 목사는 1947년에 월남해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전남 완도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10년 정도 지났을 때 천우사 사장 전태관 …

남양만 정착의 구심점 |2015. 04.14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서울에는 경기도 광주 주택단지로 이주하지 않은 판자촌 사람들이 있었다. 판자촌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적절한 일터와 주거지가 동시에 필요했다. 그런데 화성군 남양만에 간척지가 생겼다. 일부 청계천 주민들은 1975년 여름부터 1976년 가을까지 남양만으로 이주했다. 간척지 논과 주택이 이주 철거민들에게 제공됐다. 논은 무료로 주어졌지만 주택비용은 내야 했다. 청계천 사람들과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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