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만 정착의 구심점

남양만 정착의 구심점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5년 04월 14일(화) 13:19

서울에는 경기도 광주 주택단지로 이주하지 않은 판자촌 사람들이 있었다. 판자촌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적절한 일터와 주거지가 동시에 필요했다. 그런데 화성군 남양만에 간척지가 생겼다. 일부 청계천 주민들은 1975년 여름부터 1976년 가을까지 남양만으로 이주했다. 간척지 논과 주택이 이주 철거민들에게 제공됐다. 논은 무료로 주어졌지만 주택비용은 내야 했다. 청계천 사람들과 김진홍 전도사는 선교사들의 도움을 구하기도 하면서 가까스로 남양만에 안착했다. 남양만에 정착한 사람들은 농사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염분이 매우 높아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믿고 농사짓기로 결정하고 모내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3번이나 실패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에서 4번째 모내기를 한 후 온 마을 사람들은 기도했다. 별만 총총한 하늘을 보며 계속 기도했다. 1977년 10월 풍년이 들었고,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추수감사예배를 드렸다.

남양만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젊었다. 자녀들이 두 셋 이상있었다. 이들이 논과 밭에서 일을 하는 동안 자녀들은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청계천에서도 그러했듯이 남양만에서도 어린이집도 필요했고, 초, 중등학교 학생들을 돌볼 필요도 있었다. 

남양만 정착과 함께 이화리유아원이 개원됐다. 이 어린이집 설립 목적은 방치되어 있는 자녀 돌봄과 농민들의 수입증대와 생활개선, 그리고 미래 희망인 어린이 양육이었다.(선교와사회복지, 합본 I, 16) 장안, 독정, 호암, 원정, 덕다리 어린이집이 단계적으로 개설됐다. 어린이집 교사들은 오후에는 각 가정을 방문했다. 이를 통해 얻게 된 자료를 모아서 밤에 토론했다. 밤늦게까지 주민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신용조합과 공동 농사의 필요성이 논의됐다. 어린이집 교사들은 신용조합원의 자격으로 가정 방문을 하여 10원, 20원씩 모금하여 신용조합을 만들었다.(밀알회보 제9호, 2) 어린이집과 기도소를 중심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전도방법과는 전혀 달리 KNH 후원을 기반으로 실천된 보육활동이 이런 반응을 얻게 됐다. 이를 보고 노무라 목사는 "조선민족은 문(文)을 중심으로 교육열이 높은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밀알회 회보 13, 5) 

1977년 7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관계자 9명으로 구성된 남양만 지역사회선교위원회가 결성됐다. 경기노회에도 남양만선교위원회가 발족됐다. 이러한 지지 속에서 남양만 지역사회 선교 활동은 활성화됐다. 그래서 1977년 11월 KNH 총무 루어스씨가 방문했을 때에는 어린이집 7개소와 교회 겸 다목적 센터 8개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루어스 총무는 빠른 성장 때문에 직원이 부족하여 어려움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했다.(밀알회보 제9호, 3) 

김진홍 전도사의 목회방향에도 변화가 생겼다. "청계천 빈민가에 있을 때는 나는 너무나도 사회적,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복음적, 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밀알회 회보 9, 6) 김진홍 전도사는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을 '예수 공동체'라 명명했다. 그리고 남양만에 정착한 청계천 사람들과 그 지역 원주민, 전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과 함께 1978년 지역개발을 준비했다. 이화리 활빈교회를 중심으로 독정지구, 장안지구, 이화지구, 호암지구, 원정지구 5개 지역 기도소 설치 계획이 세워졌다.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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