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역사신학적 대안 모색
이치만 교수
2024년 10월 02일(수)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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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발흥과 성장은 지난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대부분은 전쟁, 자연재해, 대규모 역병을 거치면서 초기 기독교는 성장할 수 있었다. 165년과 260년에 기록적인 전염병이 유행했다. 그 당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의 사망률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이교도들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멀리하여 그들을 격리했다. 일상적인 음식과 물의 공급이 제한되어서 감염자들은 대부분 사망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공동체만이 아니라 공동체 바깥의 사람들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감염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도왔다.
조선왕조에 '세도'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원래 세상이 순행하는 도리인 천리(天理)에 맞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世道'였다. 조선시대 조광조와 같은 사림(士林)들이 표방했던 통치원리이다. 그런데 이 '世道'는 영·정조 시대 이후에 '勢道'가 되었다. '世道'는 없어지고 권문세도가(權門勢道家)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 선교사들이 내한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는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파송 받아, 부인 로즈 엘리(Rose Ely Moore)와 함께 1892년 9월 21일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다. 무어 선교사 부부는 집 구경하러 온 이웃 주민들에게 집을 보여주기도 하고 새로 판 우물물을 제공했다. 우물의 자유로운 제공은 이웃 주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당시 평민들 대부분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냇가까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길어 나르는 수고를 해야 했다. 물을 길으러 오는 아낙네들은 보통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무어는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노래도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고정적으로 모인다고 판단되었을 즈음, 학당을 열고 체계적인 교육을 했다.
이와 같은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친분을 쌓은 몇몇 교인들과 가정예배를 드렸다. 학당의 학부모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첫 해 말에 교인수 43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서울의 두 번째 장로교회'인 곤당골교회(승동교회의 전신)의 시작이었다.
무어의 사역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백정(白丁) 해방운동이었다. 백정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천민계급이었다. 백정은 평민들과 다른 옷을 입어야 했고, 망건이나 갓을 쓸 수도 없었다. 걸을 때도 우스꽝스럽게 허리와 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깡충깡충 뛰면서 걸어야 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교수형을 면치 못했다.
곤당골교회에는 백정 출신 교인들이 출석했다. 하지만 백정의 출석으로 인해 기존 양반 교인들과 진통을 겪었다. 곤당골교회의 무어 선교사는 백정들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얼마나 비참한 차별을 받아 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사회적 차별이 교회 안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견을 에비슨에 전했다. 그래서 에비슨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백정 차별의 혁파를 위해 노력했다. 무어는 백정에 대한 사회적 폐습을 불식하기 위해 사회적·문화적 규율과 제도를 바꾸려는 공적 역할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편 이 시기에 자기를 내어준 선교사가 있었다. 윌리엄 홀(William J. Hall)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으로 미북감리회의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91년 내한했다. 1894년 1월 윌리엄 홀은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선교를 본격화했다. 부인 로제타 홀도 그해 5월 4일 제물포를 떠나 배편으로 평양으로 옮겨와 제임스 홀의 사역을 도왔다.
당시 청일전쟁의 전장이었던 평양과 그 일대는 청국군과 일본군이 장악한 무법천지였다. 조선 관리들은 모두 도망갔고 집들은 파괴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콜레라가 창궐했다. 조선정부는 백성들을 방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윌리엄 홀은 의사, 간호사, 약제사 등 몇 사람의 역할을 혼자서 감당했다. 그 여파로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하더니 이내 매우 심각해졌다. 결국 서울로 이송되어 치료받던 중, 1894년 11월 24일 윌리엄 홀은 임신 중인 부인 로제타 홀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평양에 갔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작고했다.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은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Yorkshire)주 웨스트라이딩(West Riding)의 재거그린(Jagger Green)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66년 캐나다의 온타리오(Ontario)주 웨스턴(Weston)에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한국선교에 대한 강연을 접하고 한국선교를 결심했다.
기독교 전래 초기에 내한한 선교사들은 수많은 질병을 접했다. 1895년에 콜레라가 치명적인 파도처럼 몰려왔다.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 "하루에 500명이 콜레라로 죽는다. 하늘은 울음과 곡하는 소리로 가득하다"라고 적었다.
에비슨 선교사는 평안도지역으로부터 유래한 콜레라 발병소식을 접하고 총리대신과 면담을 주선하여 방역 조처를 촉구했다. 에비슨의 노력으로 콜레라 전담병원이 만들어졌으나 감염자수에 비해서 시설은 부족했다. 이에 의사이기도 하였던 홀턴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부인은 서대문 근처의 조그만 병원을 피난처로 개조하여 콜레라 환자들을 수용했다. 살리실 산에서 추출한 살롤(salol)을 환자들에게 제공했다. 이 약은 소염 진통과 장 청소에 효과가 있어서 환자들의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피난처에서 환자의 생존율은 65%에 육박했다.
선교사들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896년부터 1916년까지의 교회가 설립된 수의 증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을 내어주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한국인들은 그들 마음에 있는 사랑을 보았다. 즉 한국인들에게 복음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 텍스트를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복음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구한말은 조선의 가문이기주의가 최고조였던 시기였다. 나라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당장에 자기 가문이 건재할 길로 걸어갔다. 이때 복음이 들어왔다. 아직 교회의 모습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이 하는 일을 목격했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본 것이다.
복음은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을 내 가족처럼 받아들이겠다는 소식이다. 예수가 당부하고 스스로 실천하신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족이기주의로 기울고 있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착시현상인가. 모두 다 '나는 소중하다'고 외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말은 종종 '나만 소중한 것처럼', '우리 가족만 소중한 것처럼', '우리 공동체만 소중한 것처럼' 드러난다. 구한말의 우리 민족이 망국의 길로 달려 나간 모습과 흡사하다. 또한 그 당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한 일, 그리고 주 예수께서 당부하시고 스스로 몸으로 보여주신 일과 한참 벗어난 모습이다. 민족과 함께 한 한국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아마도 '세상'의 가족이기주의에 교회조차도 빠져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은 예수가 그러했듯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내어줘서 우리는 살리시는 능력이다. 초대교회가 성장했던 것도 바로 성령의 능력이었고, 초기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이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성장하려면, 예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치만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이교도들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멀리하여 그들을 격리했다. 일상적인 음식과 물의 공급이 제한되어서 감염자들은 대부분 사망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공동체만이 아니라 공동체 바깥의 사람들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감염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도왔다.
조선왕조에 '세도'라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원래 세상이 순행하는 도리인 천리(天理)에 맞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世道'였다. 조선시대 조광조와 같은 사림(士林)들이 표방했던 통치원리이다. 그런데 이 '世道'는 영·정조 시대 이후에 '勢道'가 되었다. '世道'는 없어지고 권문세도가(權門勢道家)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에 선교사들이 내한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는 미북장로회 선교사로 파송 받아, 부인 로즈 엘리(Rose Ely Moore)와 함께 1892년 9월 21일 양화진 나루에 도착했다. 무어 선교사 부부는 집 구경하러 온 이웃 주민들에게 집을 보여주기도 하고 새로 판 우물물을 제공했다. 우물의 자유로운 제공은 이웃 주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당시 평민들 대부분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냇가까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길어 나르는 수고를 해야 했다. 물을 길으러 오는 아낙네들은 보통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마련이었다. 무어는 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노래도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고정적으로 모인다고 판단되었을 즈음, 학당을 열고 체계적인 교육을 했다.
이와 같은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친분을 쌓은 몇몇 교인들과 가정예배를 드렸다. 학당의 학부모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첫 해 말에 교인수 43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서울의 두 번째 장로교회'인 곤당골교회(승동교회의 전신)의 시작이었다.
무어의 사역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백정(白丁) 해방운동이었다. 백정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한 천민계급이었다. 백정은 평민들과 다른 옷을 입어야 했고, 망건이나 갓을 쓸 수도 없었다. 걸을 때도 우스꽝스럽게 허리와 다리를 약간 구부리고 깡충깡충 뛰면서 걸어야 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교수형을 면치 못했다.
곤당골교회에는 백정 출신 교인들이 출석했다. 하지만 백정의 출석으로 인해 기존 양반 교인들과 진통을 겪었다. 곤당골교회의 무어 선교사는 백정들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얼마나 비참한 차별을 받아 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사회적 차별이 교회 안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의견을 에비슨에 전했다. 그래서 에비슨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백정 차별의 혁파를 위해 노력했다. 무어는 백정에 대한 사회적 폐습을 불식하기 위해 사회적·문화적 규율과 제도를 바꾸려는 공적 역할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편 이 시기에 자기를 내어준 선교사가 있었다. 윌리엄 홀(William J. Hall)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으로 미북감리회의 의료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91년 내한했다. 1894년 1월 윌리엄 홀은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선교를 본격화했다. 부인 로제타 홀도 그해 5월 4일 제물포를 떠나 배편으로 평양으로 옮겨와 제임스 홀의 사역을 도왔다.
당시 청일전쟁의 전장이었던 평양과 그 일대는 청국군과 일본군이 장악한 무법천지였다. 조선 관리들은 모두 도망갔고 집들은 파괴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콜레라가 창궐했다. 조선정부는 백성들을 방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윌리엄 홀은 의사, 간호사, 약제사 등 몇 사람의 역할을 혼자서 감당했다. 그 여파로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하더니 이내 매우 심각해졌다. 결국 서울로 이송되어 치료받던 중, 1894년 11월 24일 윌리엄 홀은 임신 중인 부인 로제타 홀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내가 평양에 갔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작고했다.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은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Yorkshire)주 웨스트라이딩(West Riding)의 재거그린(Jagger Green)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866년 캐나다의 온타리오(Ontario)주 웨스턴(Weston)에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에비슨은 언더우드의 한국선교에 대한 강연을 접하고 한국선교를 결심했다.
기독교 전래 초기에 내한한 선교사들은 수많은 질병을 접했다. 1895년에 콜레라가 치명적인 파도처럼 몰려왔다.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 "하루에 500명이 콜레라로 죽는다. 하늘은 울음과 곡하는 소리로 가득하다"라고 적었다.
에비슨 선교사는 평안도지역으로부터 유래한 콜레라 발병소식을 접하고 총리대신과 면담을 주선하여 방역 조처를 촉구했다. 에비슨의 노력으로 콜레라 전담병원이 만들어졌으나 감염자수에 비해서 시설은 부족했다. 이에 의사이기도 하였던 홀턴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부인은 서대문 근처의 조그만 병원을 피난처로 개조하여 콜레라 환자들을 수용했다. 살리실 산에서 추출한 살롤(salol)을 환자들에게 제공했다. 이 약은 소염 진통과 장 청소에 효과가 있어서 환자들의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피난처에서 환자의 생존율은 65%에 육박했다.
선교사들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896년부터 1916년까지의 교회가 설립된 수의 증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을 내어주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한국인들은 그들 마음에 있는 사랑을 보았다. 즉 한국인들에게 복음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 텍스트를 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복음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구한말은 조선의 가문이기주의가 최고조였던 시기였다. 나라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당장에 자기 가문이 건재할 길로 걸어갔다. 이때 복음이 들어왔다. 아직 교회의 모습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이 하는 일을 목격했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본 것이다.
복음은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을 내 가족처럼 받아들이겠다는 소식이다. 예수가 당부하고 스스로 실천하신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가족이기주의로 기울고 있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착시현상인가. 모두 다 '나는 소중하다'고 외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말은 종종 '나만 소중한 것처럼', '우리 가족만 소중한 것처럼', '우리 공동체만 소중한 것처럼' 드러난다. 구한말의 우리 민족이 망국의 길로 달려 나간 모습과 흡사하다. 또한 그 당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한 일, 그리고 주 예수께서 당부하시고 스스로 몸으로 보여주신 일과 한참 벗어난 모습이다. 민족과 함께 한 한국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아마도 '세상'의 가족이기주의에 교회조차도 빠져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은 예수가 그러했듯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내어줘서 우리는 살리시는 능력이다. 초대교회가 성장했던 것도 바로 성령의 능력이었고, 초기 한국교회가 성장한 것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능력이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성장하려면, 예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치만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