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금 운동의 계기

모금 운동의 계기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5년 05월 06일(수) 15:52

한독아동복지선교협의회의 모든 사업들은 KNH 후원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아협의 새로운 변화는 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1985년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됐다. 그 곳에서 1983년 한아협의 일을 잠시 접어두고 미국 유학을 떠났던 황화자 전도사는 난지도 쓰레기 집하장 근처에서 목회하다가 별세한 황광은 목사 사모를 만났다. 황화자 전도사는 1968년 장로회신학대학 졸업 후 사역하던 연동교회에서 가난한 노점상인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도 교회에 올 수 있는지 물었다. 대광중학교 성경교사를 하던 중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성경시간에 서무실에 불려가는 학생들을 보았다. 황 전도사는 그 때부터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교회시보 1989. 11. 26, 5면) 

이후 황 전도사는 김진홍 목사나 최규성 목사와 마찬가지로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받는 동안 청계천 판자촌, 동숭동 낙산에 사는 빈민들과 철거민 이주를 위해 조성된 광주 대단지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1971년 4월 훈련이 끝나자 금화아파트로 갔다. 금화아파트는 주거환경개선 차원에서 빈민촌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세워진 최초의 서민아파트였다.(동아일보 2014. 7. 3) 황 전도사는 '사회교육봉사센터'란 이름을 내걸고 소비자 운동, 무료진료, 중고생 야간학교를 통해 주민들에게 하나님을 전하였다.(빛과 소금 1991. 5, 37) 
1974년 황 전도사가 서울서노회 여전도회연합회 총무가 되면서 금화아파트 지역사회 선교는 서연합회 사업이 됐다. 이후 남양만지역 KNH 후원 사업을 도왔다. 1980년 남양만 지역 탁아사업이 어려움을 겪을 때 노무라 목사의 강권에 의하여 남양만 지역 어린이집 운영위원이 되었다. 남양만지역 어린이집 원장들과 조직한 이 위원회를 통하여 황 전도사는 KNH 후원을 통한 아동복지사업이 중단되지 않도록 힘을 쏟았다. 1981년 황 전도사는 상계동 노원유아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여전히 남양만지역 어린이집과 KNH 교량 역할을 하며 매 주 몇 번씩 서울과 남양만을 오고 갔다. 뿐만 아니라 KNH 관계자들이 방한했을 때 통역이나 안내를 맡기도 했다. 그래서 1981년 4월과 5월에 노무라 목사가 남양만 이외의 지역에서 봉사가 필요한 지역과 일꾼을 찾고자 제주도와 우도, 부산, 전라도 광주 등 남해안 농촌지역과 서해안 개화도 간척지 등을 돌아볼 때도 동행했다.(1981. 11 밀알회보 13호, 19)

이렇듯 동분서주하며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돌보던 황 전도사는 198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맥코믹 신학교 목회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교포들과 성경공부를 했다. 졸업논문 '선교로서의 주간보호 사업(Mission As A Day Care Center)'을 완성하고 귀국을 준비하는 중에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교포들에게 그의 사역을 소개했다. 이 자리에는 황광은 목사 사모 김유선 권사가 있었다. 김 권사의 남편 황광은 목사는 생전에 빈민 선교를 하면서 어린이 돌봄을 꿈꿨다. 그러나 그의 꿈과 계획서는 유품이 되고 말았다. 황 전도사의 사역 설명을 듣자 김 권사는 함께 있던 김도순 권사와 함께 그 자리에서 후원 회원이 되겠다고 자원했다. 그리고 매월 20달러 후원을 작정했다. 김 권사는 남편의 유품 가운데서 '한국아동복지 사업계획서'를 꺼내어 사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황화자 전도사에게 건넸다.(김유선 권사, '황화자 총무님을 그리며', 선교와 사회복지, 합본 II, 392) 그 자리에 있던 10여 명의 사람들도 후원자가 되기로 자원했다. 황 전도사가 1985년 9월 귀국 후 한아협 일을 다시 시작했을 때 미국 시카고 교포들의 후원금은 KNH 후원시설인 장안제이유아원 화장실 신축 기금이 됐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만남과 후원 결정은 당장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돕고 있던 한아협의 새로운 변화 터전이 되었다.
/여전도회작은자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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