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협 조직의 정비

한아협 조직의 정비

[ 작은자 복지선교 40년 ]

차유진 기자 echa@pckworld.com
2015년 04월 14일(화) 14:05

한독아동복지선교협의회 발족과 함께 조직된 것은 운영위원회였다. 그러나 한아협의 조직 정비는 1984년에 가서야 서서히 진행됐다. 가장 먼저 정비된 조직은 시설장모임이었다. 1984년 2월 27일 각 시설장들은 기독교회관 810호에서 처음 모였다. 여기에 모인 18명의 시설장들은 자립대책을 논의했고, 한아협 사무실 예산안도 검토했다. 10여 일 후 3월 12일 시설장들은 다시 모여 자립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4월부터 기금을 조성했다. 

한아협 운영위원들의 모임은 1984년 11월 KNH 루어스 총무의 방한 후에 이뤄졌다. 각 교단 대표들의 첫 번째 모임은 11월 15일에 세종호텔에서 있었고, 각 교단 대표들과 한아협 관계자 5명과 독일 KNH 본부에서 온 두 사람이 임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이 회의에서는 1984년 2월 시설장 회의에서 검토되었던 한아협 사무실 새해 예산안이 검토됐다. 한아협의 미래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이때부터 한아협 산하시설의 일들이 임원회와 총회에서 다뤄지기 시작했으며 시설장 회의 횟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1985년 1월 21일 오후 2시에 한아협 총회가 1981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첫 번 총회와 정관 자료는 분실됐기에 총회 참석자나 장소, 정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985년 회의록에 의하면, 한아협 운영위원은 총 10명이었고, 예장 사회부 총무 정봉덕 장로가 총무를 맡고 예장 코디네이터로 윤영애 집사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사무실 업무는 나영희 간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대표하는 운영위원은 동인천산업선교센타 이국선 목사, 한신대학교 고재식 교수, 전 기장 총회 간사 강원구였고, 구세군을 대표하는 운영위원은 구세군 사회부 서기관 권태훈 참령과 서울후생학원 원장 양희동 참령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대표하는 운영위원은 예장 총회사회부 총무 정봉덕 장로, 예장 사회부 지역사회선교 시범교회 도림교회 유의웅 목사, 장로회신학대학 오성춘 교수, 전 예장 총회 사회부 간사 박창빈 목사였다. 

1985년 총회는 구세군빌딩 5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가입 결의에 따라 정관 제2항 제1조 구성원에 기독교대한감리회 가입이 결의됐다. 정관 제2항 제5조 임원 구성도 수정되었다. 감사를 1인이나 2인을 선정하고 임원회에 참석하도록 하며 상반기와 하반기 연 2회 한아협 사무실 장부를 감사하도록 했다. 한아협 첫 번 감사로는 그 동안 회장을 맡고 있던 기장 이국선 목사와 기독교 대한감리회 정명기 목사가 선임됐다. 이와 함께 구세군 권태훈 참령이 신임회장으로 선임됐고, 유의웅 목사에게 회계가 맡겨졌고, 서기는 정봉덕 총무가 겸임했다. 한아협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임원 외에 KNH 루어스 총무, 강원구 목사, 고재식 교수, 오성춘 교수, 박창빈 목사, 양희동 서울후생학원 원장, 황화자 전도사가 선정됐다. 이후 각 교단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운영위원도 바뀌었다. 총회는 1992년까지 매년 1월에 열렸으며, 임원회는 1991년 4월까지 제37회 개최되면서 한아협의 대부분의 문제를 의논했다. 

1984년부터 1993년까지 계속 이어졌던 시설장 회의는 처음에는 한아협의 모든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모임이었다. 그러다가 운영위원회 총회와 임원회가 활성화되면서 점차적으로 친목도모와 재교육의 장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산하 시설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시설장들의 모임이 었기에 시설 운영, 교사 교육, 자립대책 등 각 시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해결 방안이 모색됐다. 그러므로 운영위원회 총회와 임원회가 한아협의 중심, 즉 심장이었다면, 시설장 회의는 그 심장에서 출발된 혈액을 모세혈관까지 전달했다가 다시 그것을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동맥과 정맥의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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