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 |2023. 07.07
[ 동인시선 ]   

사막이 사라지리 시퍼런 물들과 그 속의 물고기들과 물고기들의 혼이 바닷물과 합쳐질 것이리 덮어버린 사막에서 춤을 추며 떠다니는 영혼들을 달랠 것이리 조개들이 집에서 뛰쳐나와 짠물을 술처럼 마시며 또 뱉어내며 영혼들의 찌끼를 핥을 것이리 다시금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겨 물들을 빼앗아 가면 물고기들은 혼비백산하고 조개들은 모래 속에 깊이 숨어들 것이리 사막이 다시 일어설 때 부서졌던 몸을 일으켜 …

비트를 깎다 |2023. 06.09
[ 동인시선 ]   

비트를 깎다 날선 신문 모서리에 손가락이 베인 아침에 뼛속까진 붉은 무 비트를 사각사각 깎는다 핏물이 고인 살갗이 드러날 때마다 동네에 있는 교회 하나님이 없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오른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길을 십자가를 등에 지고 힘겹게 걸어가던 예수에게 돌을 던지던 관중들의 거친 눈빛이 주일 예배를 마치고 평온한 얼굴로 거리를 걸어가는 나의 가슴에 새총처럼 박힌다 그 아픈 기억을 칼날…

어머니 손가락에는 울돌목이 있다 |2023. 05.12
[ 동인시선 ]   

어머니 손가락에는 울돌목이 있다 시: 이순주 조류 흐름이 빠른 그 손으로 가족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물리쳤을까 어머니 손가락 마디마다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이 있다 하루는 바다 위에 뜬 한 척 배이고 그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었으니, 급물살로 일생 몇 척의 배를 띄워 보냈을까 밀물과 썰물에 조류 방향이 바뀌고 그때마다 소용돌이 위치가 변하는 그곳에서 해가 뜨고 지고, 일상이 높아진 수…

그 겨울의 일기 |2022. 12.18
[ 동인시선 ]   

그 겨울의 일기 나의 나라와 너의 나라는 밀접하다 그러나 20퍼센트는 아직도 낯설다 나의 나라와 너의 나라의 그 경계에 눈이 내리기도 하고 따뜻했던 말들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도 나의 너에 대한 연민은 여전히 깊다 성에 낀 유리창에 나는 손가락으로 '봄'이라고 쓴다 너의 나라가 조금이라도 밝아진다면 나는 기꺼이 어두워질 수 있다 나의 나라는 긴 잠을 잘 것이다 저녁이 되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광야에서 부르는 싯딤의 노래 |2022. 11.30
[ 동인시선 ]   

당신 내부로 흘러드는 게 꿈이었어요 정오의 반짝이는 등지느러미 떼, 여름 숲을 몰아오는 한 소절 푸른 허밍은 기원 없는 소요일까요 긴 혀 날름거리는 초식의 풀들과 붕붕대는 벌 떼의 노략질에도 울지 않는 나는, 의기양양 가시선인장처럼 독해져 갔어요 수백 배 뿌리를 내는, 한 방향으로 외로이 쏠린 광야의 싯딤*이기도 했으니까요 이글거리는 햇살과 모래바람이 나를 비켜간 적 없으나 불어오는 바람의 …

초겨울을 바라보며 |2022. 10.26
[ 동인시선 ]   

초겨울을 바라보며 깊은 산행을 떠나려니 엽서나 한 장 띄우려니 새끼내 들녘이 갯벌처럼 속살을 드러내고 가을을 앓더니 개산은 멀찌감치 암청색이다 대청 건너엔 그녀의 메마른 입술마냥 엷게 포개지는 오후 햇살 맞을 채비도 못한 채 벽에 걸린 나무 십자가는 예처럼 가난하다 떠나가는 우리 모든 걸 위해 늦게나마 만찬을 준비하는 따슨 손길처럼 찾아올지도 모를 작은 자를 위해 호롱을 내어 단 노을 물든 …

때문이다 |2022. 09.28
[ 동인시선 ]   

때문이다 - 시편 136편 묵상시 칠흑 어둠 속에서도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희미하게 혹은 환하게 하나의 별이 되어 우리의 항해를 인도하시는 끝없이 조건없는 사랑은 맨 처음 이마고 데이로 만드신 때문이다 고단한 사랑을 몸소 보이시며 죽음을 부활로 반전시키시고 높디 높은 아파트 사이 대로에서나 깊고 험한 산속 오솔길에서나 미물로 살아가는 너와 나를 하나하나 챙기시는 것은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

노안(老眼)의 새벽 |2022. 08.24
[ 동인시선 ]   

노안(老眼)의 새벽 웅이네 가구 간판을 옹이네 가구로 읽고 다녔다 유장한 아무르 강도 아모르 강이라 기억했다 여름 수련회 민박집 한 방에 누워 철썩이는 파도에 실리는 얘기들 몸 뒤척이며 듣는다 누가 때 묻은 천사의 날개라는 말을 흘릴 때 때 묻은 것은 천사일까 날개일까 궁금증은 접는다 인생이 왔다 갔다 한다는 그의 내력도 나의 내력에도 백태가 끼었다 우리 기억은 너와집, 옹이가 많다고 잘 못…

머뭇거리는 침묵 |2022. 07.21
[ 동인시선 ]   

머뭇거리는 침묵 그녀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머리맡을 맴돌던 숫자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키우던 사랑초는 꽃잎 흔들며 젖고 있는데 문을 열고 침대 하나 들어온다 직립을 휩쓸고 간 바람이 울대에 갇혀있는지 입을 열 때마다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로의 기척만을 어루만지는 숨결 어떤 말은 깊어 꺼내지 못해 침묵이 되는지 꺾인 모음 사이 촛농처럼 굳어갔다 필사적인 몸짓으로 어둠을 밀어내는 어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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