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하면 헌신짝이 될까

헌신하면 헌신짝이 될까

[ 가정예배 ] 2022년 12월 16일 드리는 가정예배

강용일 목사
2022년 12월 16일(금) 00:10

강용일목사

▶본문 : 룻기 4장 13~17절

▶찬송 : 216장



10여 년 전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사회에 나가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 43가지'가 화제를 모았다. 이 글은 '43 계명'으로 불렸다. '티끌은 모아봐야 티끌', '가는 말이 고우면 나를 우습게 본다' 등이다. 그중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내가 헌신했으니 그도 나에게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나아가 그 기대가 무너지면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준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무의식 속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다.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 가정에 기업 무를 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먼저 자기 돈을 들여 그 친족의 땅을 사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결혼해서 낳은 자녀를 그 친족의 자녀로 키워야만 했다. 이 일은 경제적, 정신적으로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서 본문에도 이것을 거부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룻 4:6). '기업 무를 자'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려면 희생도 감수해야만 한다. 희생이 없이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보아스는 십자가의 희생을 감수하며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신 예수님의 예표이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다(벧전 3:18). 뿐만 아니라 아들이 없어 소망을 잃은 과부와 같이 인생의 소망을 상실하고 아파하던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맞아 주셨다(마 9:15). 또한 죄와 사망의 권세 잡은 사단을 멸하시고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셨다(눅 10:18).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물질이든지, 시간이든지, 육체적인 힘이든지 그 무엇이라도 기꺼이 희생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보아스와 같이, 예수님과 같이 손해를 감수하는 사랑,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보아스는 많은 것을 헌신했다. 그렇다고 그 헌신이 헌신짝이 되었을까?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는 얻은 것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본문 17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가 낳은 아들이 다윗의 조상이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다. 물론 보아스가 낳은 아들 오벳은 그의 할머니인 나오미의 족보에 들어갔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보아스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나는 이름 없이 사라져도 내 자녀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길을 갈 것 같다. 헌신하면 헌신짝 되지 않는다. 인간적인 섭섭함으로 사랑과 헌신의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아스와 같이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말뿐이 아니라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의기도

말만 앞서고 실천이 없는 사랑이 아니라 보아스처럼 예수님처럼 이웃과 형제자매를 위한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강용일 목사/녹동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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