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현교회 길선주의 안경

장대현교회 길선주의 안경

[ 이야기박물관 ]

신상현 목사
2022년 11월 14일(월) 14:20
1907년 장대현교회의 담임 길선주 목사
길선주 목사의 안경과 안경집.
1893년 평양에 장대현교회가 설립되고 선교사들의 사역이 시작되면서, 길선주(吉善宙, 1869~1935)는 동료 김종섭(金鍾燮, 1862~1940)을 마포삼열(S.A. Moffett)에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기독교와 거리를 두고 탐색을 시작했다. 종교심이 남달라 이미 유교, 불교, 관성교(關聖敎), 선도 등을 두루 섭렵했던 도인 길선주의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1895년 김종섭이 먼저 개종하고 길선주에게 예수를 믿도록 권하자 "서학(西學)에 변심하는 김 씨 같은 자는 목을 베리라"며 대노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종섭의 전도는 계속됐고, 이에 길선주는 1895년부터 중국 성서공회 탁인판(拓印版) 중국어 '관주신약'을 입수해 스스로 기독교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김종섭은 1896년 봄 청일전쟁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평양에 돌아온 길선주를 본격적으로 전도했다. 김종섭은 그를 방문할 때마다 '그리스도 신문'을 읽어주었으며 '이선생전'과 '장원양우상론'같은 전도문서들을 소개했다. 도(道)를 닦고 공부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길선주는 문서를 통해 기독교에 눈을 뜬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중에 자신을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체험을 한다.

1897년 8월에 29세의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에서 이길함(Graham Lee, 1861~1916)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1898년 늦은 봄에 장대현교회의 영수로 피택된다.

그 후 길선주는 전도, 교육, 문맹퇴치 등에 앞장섰다. 이미 선도와 차력에 통달해 명성을 떨쳤던 그가 이제 기독교 신자가 돼 절망 속에 신음하던 사회에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1900년 우리나라 장로교인 수가 1만 명이 넘어가면서, 한국인 목회자에 대한 열망은 1901년 장신대의 모체인 '신학반(Theological Class)'을 시작하게 했다. 그에 발맞추듯 같은 해 길선주는 장로로 장립을 받았고, 1903년에는 '신학반'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성경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함께 선교사를 통해 입수한 한문 주석과 신학 서적, 이름 있는 동양철학 및 종교, 문학에 관한 수백 권의 한문서적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때 백내장으로 시력장애가 찾아왔다. 마포삼열의 아내 엘리스(A.F. Moffett 1870~1912)가 1904년 9월 6일에 친정아버지에게 쓴 편지는 그때 길선주의 형편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의 나이 35세에 장로와 목사후보생으로의 사역과 직업을 앞두고 시력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흑암이 올 것인데 이는 완전한 경성 백내장을 의미합니다. 그때 마침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화이팅(H.C. Whiting 1865~1945) 의사가 왔고,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백내장 제거 수술을 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의 질환은 우리의 특별 기도제목이 됐으며, 그의 시력 회복을 위해 전 교회가 기도했습니다. 붕대를 제거한 날 길 장로는 전에 쓰던 눈에 맞게 제작된 백내장용 안경을 쓴 채 다시 설교단에 섰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봉독했습니다.'

이후 길선주는 밝은 햇빛이 있으면 안경을 끼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아들 길진경은 아버지 길선주에 대해 "성경을 매일 한 시간씩 읽고-외우려고 힘쓰셨고, 성경연구와 집필에 하루 평균 3시간, 그리고 하루도 빠짐 없이 2시간의 독서를 계속하셨다. 일생을 통해 구약 전권을 30회, 창세기와 에스더와 이사야서는 540회, 신약전권은 100회, 묵시록은 만 독, 요한 서신은 500회를 독파했다"고 증언했다. 말년에는 자신을 인도해줄 사람을 데리고 다녀야 했지만, 길선주의 일상과 함께했던 이 안경은 그의 열심만큼 소중했던 유품이다.

신상현 목사 /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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