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돌봄'을 생각해보다

새로운 '돌봄'을 생각해보다

[ Y칼럼 ] 신하진 청년 ②

신하진 청년
2022년 10월 13일(목) 14:03
교회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교인들과 교회 밖의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타인에 대한 '돌봄'을 행할 때, 과연 이것이 동등한 존재로서 주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행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최근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돌봄을 다루는 학교 수업을 들으며 내가 알고 있던 '돌봄'의 개념을 재정의할 필요를 느꼈다. 철저히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며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은 부수적이고 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돌봄은 스스로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가족, 친구,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것, 동물과 식물에 대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 돌봄은 사적인 영역 내에서 특정 구성원, 주로 여성의 희생으로 이루어지거나 경제적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이 이용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간에서는 조금 다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교회에서는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돌봄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과연 그 돌봄이 시혜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의 여유를 더 가진 사람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봄을 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동료 시민으로서, 같은 공동체 내의 교인으로서 동등한 존재에게 주는 것은 쉽지 않다. 그로 인해 받는 사람이 공동체 내에서 고개 숙이게 된다면 시혜적이지 않은 돌봄이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돌봄을 행하려면 그것을 받는 사람을 섬세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받는 사람 또한 돌봄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주는 사람이 빳빳하고 받는 사람이 고개 숙이게 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돌봄이 가능한 교회를 상상해본다.

신하진 청년 / 새민족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