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김학수 화백의 '풍랑을 잔잔케'

1976년, 김학수 화백의 '풍랑을 잔잔케'

[ 이야기박물관 ]

신상현 목사
2022년 08월 15일(월) 09:47
김학수 화백이 한지에 그린 수묵담채 '풍랑을 잔잔케', 87x64cm, 1976,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 소장.
혜촌(惠村) 김학수(1919~2009년)는 한국 최고의 역사기록화가이자 풍속화가다. 그의 정확한 고증은 '세종대왕 일대기' 연작 등의 걸출한 역사화와 '한강전도'라는 대작 기록화를 남겼고, 민간의 미담, 풍속 등을 재현한 풍속화를 보여준다. 또 한편으로 김학수는 독실한 기독교인 미술가였다. 장로였던 그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제물포 입항 장면으로 시작하는 한국의 복음전래사를 기록한 기독교 역사풍속화 50여 점과 '예수의 생애' 연작을 남겼다. 운보 김기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연작이지만 혜촌의 작품에는 운보의 도포에 갓을 쓴 예수 대신에 유대인 복장의 예수가 등장한다. 그는 성경의 장면들을 한국인과 한국의 풍경으로 토착화했지만, 예수만은 유대인 청년의 모습으로 그렸다. 혜촌의 독특성이다. 그림 속에는 2000년 전의 예수가 조선에 임재한 듯하다.

1976년 겨울 작품 '풍랑을 잔잔케'는 한지에 수묵담채로 그린 한국화다. 그림 왼쪽 아래에 '풍랑을 잔잔케'라는 화제를 적었다. 혜촌은 이 작품에서 상상력을 사용하지만 작위적이지 않은 안정적인 구도와, 색을 덫칠하지 않고 농담만으로 색채를 조절하는 기법으로 담담하고 평온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 그림의 내용은 마가복음 4장 35~41절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저편으로 가는 중 큰 광풍이 일어났고, 제자들은 믿음대신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들은 함께 계시던 예수를 깨웠고 잠에서 깬 예수는 바람을 꾸짖어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다. 그림에서는 높은 파도가 배를 위협하고, 배 안의 제자들은 허둥대고 있다. 뱃머리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우러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두려움 하나 없이 담대하다.

혜촌의 인생에 불어닥친 전쟁, 그리고 가족과의 생이별은 분명 광풍과 같았을 것이다. 평양 출신의 혜촌 김학수는 공산당을 잠시 피한다는 생각으로 홀몸으로 월남하면서 아내와 젖먹이를 포함한 4명의 자식을 만나지 못하는 고통 속에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고향에 두고 온 어린 자식들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 함께 피난하지 못한 죄책과 고뇌는 몇 번이나 광풍처럼 그의 인생을 휘몰아쳤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때마다 뱃머리에 우뚝 서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찾아 그 절망의 위기를 지나오지 않았을까? 혜촌의 이 작품에는 광풍의 절망을 불식시키는 견고한 믿음이 보인다. 담담하고 평온하다. 실제로 그는 그 아픔과 연민을 신앙과 그림으로 승화시켰고, 전쟁고아 30여 명을 친자식처럼 돌보며 키워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신상현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 학예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