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양칼럼 ]

조택현 목사
2022년 07월 06일(수) 08:11
사람의 귀는 두 개다. 왜 하필 두 개일까. 비대칭적인 것보다는 대칭적인 얼굴 구조가 미관상 이상적이기에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셨나 보다. 생각해 보니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신 하나님은 짝을 이루는 모든 것은 대부분 대칭을 이루도록 하셨다. 귀는 얼굴의 여러 기관 중에서 가장 바깥쪽 양 끝 부분에 각각 하나씩 위치한다. 때문에 양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그리고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 할지라도 잘 잡아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던 때가 있었다. 이른바 구전시대이다. '입에서 입으로'라는 전달 시스템에서 빠져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 귀이다. 듣지 못하는 데 어떻게 전할 수 있는가? 따라서 정확히 표현하자면 '입에서 귀에서 입으로'일 것이다. 구전시대는 기록시대로 이어졌다. 기록시대에는 말씀을 볼 수 있었다. 구전시대에는 입과 귀가, 기록시대에는 눈이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구전시대이든 기록시대이든 잘 듣고 잘 보아야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29, 3:6.13.22).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각각의 편지 말미에 나타나는 공통된 글귀이다. '귀 있는 자'라는 표현이 평범하게 들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귀를 갖고 있는데 왜 굳이 '귀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는가? 반드시 들어야 할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권면이자 명령이며, 또한 세상엔 정작 들어야 할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음을 에둘러 비판하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자의 말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 이후 사도들과 복음전도자들의 말을 통하여 세상에 전파되었다. 말씀은 소리와 의미로 구성된다. 소리가 형태라고 한다면 의미는 내용이다. 말씀은 소리로만 구성될 수 없음이다. 소리 그 자체로만은 고막을 울릴 뿐이다. 의미는 잠들어 있는 뇌를 일깨우고 마음을 감동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나아가서 의미는 의식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말씀은 소리와 의미가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말씀이 된다. 그 말씀이 마음속에서 감동의 사건을 만들어 내고 그 감동이 지속적인 신앙의식을 만들어 낸다. 말씀을 그렇게 들을 수 있는 귀는 복 있는 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들을 수 있는 귀'는 열린 마음을 전제한다. 무엇을 듣든지 열린 마음으로 들으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닫힌 마음으로 들으면 머리로는 안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모르게 된다. 수긍하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모르는 것에 다름 아니며 외려 강퍅함으로 인해 차라리 듣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더 완악해졌는데 그들의 귀가 문제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귀와 연결된 그들의 닫힌 마음이 문제였다. 하나님은 잘 들으라고 사람에게 귀를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우리에게 영적인 귀를 선물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제대로 들려지게끔 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린 마음이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본래 뜻에 맞는 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조택현 목사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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