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브(forgive)와 포겟(forget) 사이

포기브(forgive)와 포겟(forget) 사이

[ Y칼럼 ] 이정인 청년 ①

이정인 청년
2022년 06월 29일(수) 13:27
청년이 된다는 건, 이제 남의 고민을 내 고민으로 바꾸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 최근 들른 빵집에서 중고등학생 때 나를 괴롭게 했던 학교폭력에 가담했던 한 자매를 만났다. 정확히는 만났다는 것보다 스쳤다. 그 자매는 예전 교회공동체에서 알고 지냈던 사이였고, 어렸던 모습을 기억해서인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교복을 입고 어리숙했던 서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정리한 쟁반을 자리로 가져다 두며 손님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사뭇 낯설었다. 신기한 점은 그 모습을 보는 내 심정이었다.

계산을 하는 중에 눈이 마주친 그 자매는 나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포인트 적립에 이름이 뜨자, "이정인 고객님 맞으십니까?" 라는 말을 하며 모니터를 응시할 뿐이었다. 답을 했지만 나도 그 자매를 바라보지 않았다. 어딘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했다. 왜 그녀가 불편해하는지, 다른 감정이었지만 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불쾌와는 다른 느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상처를 한 점 떼어내 보자면 나는 교회 중직자의 딸이었고, 그 자매는 친구를 따라 교회에 온 친구였다. 지금은 무슨 까닭인지 이해가 어렵지만, 나는 어떻게든 참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교회와 학교에서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힘겨웠고 저녁마다 "하나님이 신이시라면 나를 오늘 꼭 데려가 주세요"라는 기도를 했다. 그 상처를 기억하는 지금 그저 기억에 불과하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 딱 그 정도, 아침마다 나오는 신문에 기재된 남의 이야기를 보듯이 말이다.

아무렇지 않았다. 여러 번 곱씹어 보아도 그랬다. 아이들의 글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중에도 머릿속에서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 생각해보아도, 나는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다. 혹시 내가 삶의 고민에 치여서, '나'에 편향된 삶을 살아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솔직한 답이 나왔다. '저 자매는 지금 예수를 알까?' 그게 가장 궁금했다.

이 이야기들을 교회 청년부 공동체에서 나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하셨다는 것. 우리가 죄를 범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정말 아무렇지 않으실까? 잊는다는 것은 과거형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안아주시는 그 사랑이 은혜가 아닐까 싶다. 그 은혜를 경험한 지금 이런 것이 예수를 믿는 삶이라면 충분히 멋들어진 것 같다.

이정인 청년 / 은혜로사는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