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설 선교사 방명록에 남은 주기철 목사 흔적

편하설 선교사 방명록에 남은 주기철 목사 흔적

[ 이야기박물관 ]

신상현 목사
2022년 06월 13일(월) 12:59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 1874-1958) 선교사의 방명록, 20.5x17.5x2cm,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 전시.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편하설(Charles F. Bernheisel, 1874~1958) 선교사의 방명록에 남아있는 주기철 목사의 메모이다. 1900년 내한해 초기 장신대 및 숭실대 교수 그리고 평양 산정현교회의 초대 목사로 사역했던 편하설 선교사의 방명록에는 1922년 1월 13일 서울에서 찾아왔던 군예빈(E.W. Koons, 1880~1947) 선교사의 기록을 시작으로 1951년 6월까지 1000여 명의 이름과 주소, 방문 날짜와 메모 등이 약 70페이지 분량으로 남아있다. 주기철 목사의 기록은 1939년 4월 6일, 주기철 목사와 오정모 사모, 조만식 장로의 딸 조선부와 그 남편으로 추정되는 C. Y. Chung의 기록이 주기철 목사의 필체로 적혀있어 그들이 함께 편하설 선교사를 만나러 왔음을 알려준다.

당시는 일제강점기, 평양 산정현교회와 몇몇 교회들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대부분 교단과 교회들은 신사참배라는 광풍에 힘없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1936년 여름,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는 첫 설교에서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라고 천명했고 새 예배당 헌당식을 앞둔 1938년 2월 8일 평양경찰서에 검속된다. 이를 시작으로 1944년 4월 21일 평양형무소에서 그 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릴 때까지 5차례의 검속을 겪는다.

1938년 8월 주기철 목사는 장로교회의 농촌경제갱생을 위한 협동조합운동을 탄압한 농우회 사건으로 경북 의성경찰서에 검속돼 1939년 1월 29일에 석방된다. 선교사 설교금지령에도 결연히 산정현교회의 주일강단을 맡았던 편하설 선교사는 '지난 8월 말 검속됐던 목사들이 1월 29일 평양역에서 교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돌아왔는데 주일예배는 참석했지만 예배 인도는 할 수 없었다'고 기록해 그들에게 고문으로 인한 건강문제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산정현교회의 안이숙 여사는 이때 출옥한 주기철 목사가 부드러운 음성이지만 똑똑하고 선명하게 '살을 찢고 신경에 불을 지르는 심한 고문이 올지라도 각오했다'고 말한 것을 증언했다. 1939년 4월 6일, 편하설 방명록에 기록한 시편 118편 6절은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순교를 향한 일사각오의 근원이 하나님에 대한 흔들릴 수 없는 사랑과 믿음이었음을 당당히 외치고 있다.

신상현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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