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 신입생 안준(安濬)의 자기소개서

100여 년 전 신입생 안준(安濬)의 자기소개서

[ 이야기박물관 ]

신상현 목사
2022년 03월 15일(화) 15:29
신학생 안준이 입학하며 학교에 제출한 것으로 보이는 자기소개 소책자(1910년 추정).
'1867년생 평안북도 의주 수진면 식송리에서 났소. 평안북도 선천군 읍내 염수동에 지금 사오. 1898에 믿었소. 1899, 7월에 장로회목사 위대모(N.C. Wittemore, 1870~1952)씨에게 세례받았소. 선천읍 염수동교회에 속하였소. 동 교회에서 일보오. 영수직분이오. 믿기 전 (직)업은 약장사와 교사요. 믿은 후 (직)업은 약장사와 제중원 사무와 중학 교사도 하고 지금은 외국 서책을 번역하여 출판하오. … 믿기 전 공부한 것은 십 이세부터 이십세까지 유교경의재에서 수학하였소. 믿은 후 공부는 성경 외에 4년간 미국 의사 샤락슈(A.M. Sharrocks, 1872~1919)에게 의술토론을 대강 들었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자료는 100년 이상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신학교 신입생의 설렘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에 제출한 것이었을까? 특이하게도 가로 12.5cm, 세로 18.5cm의 신식 소책자로 만들어졌다. 두툼한 검정색 표지와 4쪽의 내지에는 신입생 안준(安濬, 1867~1922)의 친필 붓글씨가 빼곡하고, 내용은 지금 우리의 자기소개서와 비슷하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의 신입생 안준은 교사, 약사, 의료, 번역, 출판 등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과 평안북도 선천의 여러 교회에서 10년 이상을 영수(Leader)로 사역했음을 알 수 있다. 영수는 한국교회 초기 목회자가 부족할 때, 지역교회의 주일 강단을 맡아 교회를 섬겼던 직분이었다. 당시 목사후보생들은 대부분 선교사의 조사(Helper)나 영수로서 오랜 기간 사역하며 교회의 인정을 받아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906년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양전백, 김병농과 함께 개교했고, 최초의 신약성경 사전인 '신약성서전림(1912)'을 감수했던 안준과 동일인이다. 또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의 평의원으로서 '105인 사건'에 연루돼 1심에서 6년 형을 선고받았고, 1911년 가을부터 1913년 7월까지 극심한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면 그는 언제 신학교에 입학했을까? 이 자료의 내용과 함께 1912년 12월에 작성된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의 '안준 취조 시말서'의 기록으로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평양(平壤)의 신학교(神學校)에서 2년간 공부했음'과 '데라우치 총독이 1910년 12월 말 선천에 방문했을 당시 선천(宣川)에 있는 예수교 노회(老會)를 위해 밤낮으로 진력했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안준은 1910년 봄에 입학했고, 이 문서도 그때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옥고 이후로 안준의 행적은 묘연하다. 그러나 그의 신앙과 나라 사랑은 아들 안병준과 며느리 김성모로 이어졌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신입생들을 마주하며, 인생을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빚으실 그들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한편, 주님의 심판대 앞에 제출될 우리 모두의 마지막 자기소개서도 궁금해진다.

신상현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역사박물관 학예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