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리지(連理枝)

연리지(連理枝)

[ 목양칼럼 ]

박재필 목사
2021년 11월 24일(수) 08:26
탄산약수로 유명한 청주 초정리 근처에 '약속의동산'이란 우리 교회 수련원이 있다. 지난 주간에 기도할 제목들이 있어 며칠 그곳에 들어가 있는데, 관리집사님이 "목사님께 재미있는 것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라며 안내를 한다. 지금 내년 사순절 이전에 성도들에게 제공할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기 위해서 산 중턱에 중장비가 동원되어 길을 닦고 있는 중이다. 길이 시작되는 초입새에서 "목사님, 여기 연리지가 있습니다"라며 두 나무를 가리킨다.

그 말을 듣고 몇 걸음 옮기니 정말 잎새를 모두 떨군 두 그루의 큰 나무가 서로 안고 있듯이 붙어 있다. 설명을 들으니 두 그루의 수종은 참나무와 산벚나무라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번 연리지를 본 적이 있으나 대부분은 같은 수종의 나무끼리 붙어 있는 경우였다. 동백나무, 아카시아나무, 벚나무 등이 연리지를 이룬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약속의동산 연리지는 전혀 다른 수종의 결합이라 신기해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연리지(連理枝).' 사전적으로는 "맞닿아 연이어진 가지"라는 뜻이다. 뿌리가 전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 엉켜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는 효도와 관련해서 쓰이던 용어였으나 지금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부애를 나타내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그래서 관광지 풍광이 좋은 곳에 하트 모양이라도 갖춘 연리지가 있으면 그곳에 포토존을 만들어 연인과 부부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연리지를 본 후 닦고 있는 길을 따라 미리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산을 오르며 묵상을 했다. 교인들은 연리지를 이루는가. 교회는 서로 잇대어 있는가. 십자가는 연리지 아닌가.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 빛과 어둠, 지혜와 미련함, 영원과 한계.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을 십자가는 받아들인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는 분명히 죽음이요, 저주요, 어둠이요, 미련함이요, 제한적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생명이고, 복이고, 빛이고, 지혜이며, 영생이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스캔들이고 걸림돌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생명의 길이다. 이보다 완벽한 연결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바울은 이를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엡 2:14) 허무셨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 허물어짐과 하나 됨은 신앙고백 속에만 존재하고 실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십자가와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한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경제적 여건, 세대차이, 남녀, 출신지역, 정치적 견해의 차이 등 다양한 명분을 내세워서 구분을 하려고 한다.

교회는 어떤가? 출신 신학교에 따라 나뉘고, 총회에서 일어난 법리해석에 대한 견해로 분열하고, 사회법에 대한 대응의 차이에 따라 격렬하게 논쟁을 하면서 분쟁을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고 하기에 연리(連理)를 이루지 못했다.

코로나 이후 더 나뉘고 흩어질까봐 염려가 된다. 약속의동산 십자가의 길이 완성되면 두 그루가 하나 된 신기한 '연리지' 앞에 포토존을 만들어야겠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보다 연리지 앞이 더 인기가 있으면 어떻게 하나?





박재필 목사 / 청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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