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무엇인가: 아벨라르 대 베르나르

신학이란 무엇인가: 아벨라르 대 베르나르

[ 인문학산책 ] 24

안윤기 교수
2021년 07월 13일(화) 16:54
피에르 아벨라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elard, 1079~1142)는 중세의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가 엘로이즈(Heloise, 1100~1163)와 나눈 기묘한 사랑 이야기는 당대 최고의 입소문 거리였고, 공개 토론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굴복시킨 전설적인 무용담은 많은 젊은이를 매료시켰다. 그는 논리적 기초가 단단했고, 개념 사용이 예리했다. 중세 최고의 난제였던 보편논쟁에서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 1050~1124)의 유명론과 기욤 드 샹포(Guillaume de Champeaux, 1070~1121)의 실재론을 극복하고, 제3의 대안인 '개념론'을 제안한 것은 유명한 사례이다. 이것은 보편자를 '사물'(res)이나 공허한 '소리'(voces)가 아닌 '개념적 술어'(sermones)로 보는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학'(theologia)이란 단어를 기독교 세계 안으로 깊숙이 끌고 들어온 인물이다. 헬라 철학에서 유래한 이 단어를 아우구스티누스나 안셀무스 같은 초·중기 중세 사상가들은 주로 이교도 담론 체계로 간주했다. 그리고 기독교 고유의 이론을 위해서는 '신성한 교리'(sacra doctrina)라는 별도의 명칭을 붙여서 이교도의 '신학'과 구별했다. 전자에게는 계시가, 후자에게는 인간의 이성을 활용한 탐구가 주된 인식방법론이었다. 그런데 아벨라르는 기독교에도 신학, 즉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는 인간 이성이 제공한 유비의 도움을 받아 신앙의 기초에 관한 글을 썼고, 철학적 근거를 찾으려 했다. 또 하나님의 단일성과 삼위일체에 관해 신학 논문을 썼다. 이해하지 못한 단어를 주절거리는 것은 불필요하며, 또 자신이나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교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긍정과 부정'(Sic et Non)에서 아벨라르는 여러 교부의 주장을 158개 질문으로 목록화했다. 첫 번째 질문 하나만 살펴보자. "인간의 믿음은 이성을 통해 완성되지 않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각 질문은 상반된 두 주장을 붙여놓은 것이다. 비록 두 주장 모두 문헌적 근거는 있지만, 둘 다 참일 수는 없다.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리는 비판 작업이 필요하다. 그 비판적 탐구과정은 논리학에 근거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아벨라르가 생각한 기독교 신학이다.

그런데 그의 삼위일체론을 담은 논문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견지한 상태에서 삼위의 차이점을 설명하려 했다. 왕실의 구리 옥새가 구리 자체, 구리에 새겨진 이미지, 옥새를 찍는 행위로 구별할 수 있듯이, 성부는 능력, 성자는 지혜, 성령은 선의지와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을 넘어선 문제를 그럭저럭 이해하기 위해 고안한 모델에 불과했는데, 악감정을 가진 논적들은 그를 3세기의 사벨리우스(Sabellius)를 추종한 양태론적 이단이라고 종교재판에 붙였다. 1121년 스와송(Soissons)에서 열린 재판 현장에서 아벨라르는 도리어 고발인의 주장을 박살내버렸다. 혐의 입증에 실패했지만, 그래도 재판장은 아벨라르가 그 논문을 출판할 때 소홀히 한 절차 하나를 문제 삼아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약간의 손상은 있었지만, 아벨라르는 활동을 재기했다. 그가 외딴 시골에 가서 오두막을 지으니 학생들이 그리로 몰려들어서 학교가 되었고 수도원이 되었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노천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그의 책이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갔다. 그러자 그의 견해가 전통 기독교에 해가 된다고 염려한 세력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를 중심으로 다시 뭉쳤다. 베르나르는 시토 수도회의 지도자였고, 교회 개혁과 사회 정화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신비주의 신학에 정통한 그는 삼위일체 같은 성스러운 신비가 제멋대로 분석되고 시건방지게 논의되는 것은 일종의 불경죄에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아벨라르는 교회를 모독했고, 자신의 질병으로 순진한 이들의 영혼을 감염시켰다. 신앙인이라면 즉각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그는 굳이 이성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신앙은 믿는 것이지, 논쟁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그는 이성의 검토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믿지 못할 것이다".

1140년 생(Sens)에서 열린 종교회의는 베르나르가 고발한 아벨라르의 열아홉 가지 항목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재판 결과를 보고받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아벨라르를 이교도로 판결하고, 그의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이 가혹한 판결은 클뤼니 수도원장의 중재로 인해 곧바로 철회되었지만, 이듬해 아벨라르는 침묵 속에 세상을 떠났다.

아벨라르와 베르나르는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아벨라르는 하나님에 관해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베르나르는 그런 과욕을 애초부터 부리지 않는 것이 올바른 신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둘의 차이점 못지 않게 공통점도 있었다. 둘 다 하나님을 가장 소중한 분으로 생각했으며, 제각기 나름대로 당대 교회의 습관화된 신앙과 형식화된 예식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으려 했다. 아벨라르는 많은 사람이 전통과 권위에 따라 공허하게 따라 외우던 교리를 철저히 따져서 의미 있게 만들려 했다. 그리고 베르나르는 형식화된 신앙에 능동적 사랑과 헌신적 행동을 불어넣으려 했다. 이런 공통점 하에서 서로 반목했던 두 사람의 신학은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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