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의 꿈: 마네골트 대 볼프헬름

스키피오의 꿈: 마네골트 대 볼프헬름

[ 인문학산책 ] 23

안윤기 교수
2021년 07월 16일(금) 12:42
스키피오의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천상에서 누리는 복락을 이야기해 주었다.
마크로비우스의 주석서에 실린 '8층 우주'의 모습.
'스키피오의 꿈'(Somnium Scipionis)이라는 작은 문학 작품이 있다. 고대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Cicero, B.C. 106~43)의 대작인 '국가'(De re publica) 제6권에 부록으로 첨부된 이야기이다. 그 내용은 제3차 포에니전쟁의 영웅인 소(小) 스키피오(Scipio Aemilianus, B.C. 185~129)가 꿈에서 할아버지인 대(大) 스키피오(Scipio Africanus, B.C. 236~183)의 영혼을 만나 교훈을 듣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진정한 인생 성공은 육신의 향락이 아니라 영혼의 미덕에 달려 있으며, 특히 조국에 충성한 영웅에게 합당한 보상은 그를 기념하는 동상을 세우는 것 같은 이 땅에서의 영예가 아니라 천상의 영원한 기쁨"이라 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이에게 감명을 주었고, 특히 5세기에 마크로비우스 암브로시우스 테오도시우스(Macrobius Ambrosius Theodosius, 385~430)가 여기에 상세한 해설을 덧붙인 주석서는 중세인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크로비우스는 스키피오의 꿈을 일종의 '계시'로 보고, 그 안에 상징 형태로 표현된 진리를 해설하려 했다. 무엇보다도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우주론이 중요했다. 지구 위에 7개의 행성이 돌고 있으므로, 지구를 중심으로 한 8층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다(지구,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 그런데 이 중 가장 밖에 놓인 토성계만 불변하는 천상의 세계이며, 제1층~제7층은 그보다 열등하다. 영혼은 본래 천상계에서 살았는데, 육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점점 무거워져서 한 층씩 하강하다가, 결국 지구로 떨어져 육신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영혼이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려면 감성계로부터 '정화'되어야 하며, 이 일은 망각된 진리를 기억하는 수고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영혼은 계속 이 땅에 머물며 다른 육신을 전전하는 '윤회'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니까 마크로비우스의 주석은 문학 작품인 '스키피오의 꿈'을 모티브로 해서, 천문학, 지리학 등 당대 모든 과학 지식을 총망라했고, 그것을 플라톤 우주론을 통해 절묘하게 통일시킨 것이다.

1080년대 어느 날 라우텐바흐 수도원에서 두 수도사가 언쟁을 벌였다. 한 명은 마네골트(Manegold, 1030~1103)였고, 다른 한 명은 그를 만나기 위해 쾰른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 이 수도원을 방문한 볼프헬름(Wolfhelm, ?~1091)이었다. 당시 서임권 투쟁으로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팽팽히 맞서던 시절이었고, 이 둘은 각 진영의 대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논쟁은 정치적 사안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바로 마크로비우스가 '스키피오의 꿈'에 대해 쓴 주석서였다. 마네골트가 보기에 이 책은 세상 지식에 오염된 사람의 온갖 우려스러운 점을 고스란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마네골트가 볼 때, '영혼이 윤회하여 돼지 몸속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모독하는 참람한 발상이었다. 또 천상계와 지상계 사이에 중간 단계를 설정하고 '세계 영혼'을 거기 위치시켜서 하나님과 인간의 간격을 희석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까지도 자연 세계로 끌어내리게 되었다고 마네골트는 생각했다. 이런 파괴적 결과는 마크로비우스가 당대 철학과 과학 지식을 추종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세상 지혜에 담겨 있지 않다. 그러므로 논리학과 세상 지식을 버리고 온전히 성경의 가르침에 투철한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마네골트는 역설했다. 반면에 볼프헬름은 마크로비우스의 책 내용에 대체로 동의했고, 중세 교육 시스템에서 점차 자리잡아가던 논리학과 자연과학 지식의 사용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요컨대 세상과 구별된 수도사 영성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과학 지식을 받아들이며 세상과 발맞춰 나가려할 것이냐의 선택을 두고 마네골트와 볼프헬름은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학술 논쟁 이면에는 정치적 이슈, 즉 교황파와 황제파의 서임권 투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성직자의 임명은 막대한 이권이 걸린 사안이었다. 교황을 지지하는 자들은 세상과 구별된 교회의 고유영역이 있고 서임권은 엄연히 이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반면에 황제나 영주가 자국 내 성직자 임명하는 것을 지지하는 자들은 성·속의 구별 없는 세상에서 권력 질서가 자연스럽게 정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천 년 전 라우텐바흐 수도원에서 벌어진 논쟁과 비슷한 모습은 지금도 발견된다. 진화론이나 포스트휴머니즘 같은 첨단 과학에서 전통적 인간관, 세계관과 다른 주장을 펼칠 때 어떤 이는 이를 외면하려 하고, 어떤 이는 적극 수용하려 한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정립할 때도 어떤 이는 '구별'과 '거룩성'을 강조하고, 어떤 이는 '소통'과 '봉사'에 방점을 찍으려 한다. 혹시 그 이면에 세상 권세와 물질적 풍요에 대한 이해타산이 깔려있지는 않은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스키피오의 꿈'은 "하늘의 더 큰 보상을 기대하라"고 말해주는데, 우리는 너무 이 땅에 연연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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