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의 한계를 넘은 복음의 선포자

기득권의 한계를 넘은 복음의 선포자

[ 창간75주년기획 ] '역사에게 내일의 길을 묻다' 3. 교회의 영적각성 이끈 요한 웨슬리

김보현 목사
2021년 03월 16일(화) 08:15
웨슬리의 첫 야외설교지였던 한함마운트 언덕. 지금은 주택가로 둘러싸여있는 그곳의 야외설교단 바닥에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웨슬리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브리스톨에서 시작한 여정을 서둘러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에 만나 보아야 할 인물이 있다. 18세기 감리교 운동을 통해 교회의 영적 각성을 이끌었고 치유했던 요한 웨슬리이다.

# 영국과 영국교회의 격변기 속에서

영국의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과 달리 왕실의 결혼 문제로 촉발됐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 이후에도 군주의 종교적 입장에 따라 격랑과 진통을 넘어 순교와 전쟁, 학살의 소용돌이로 16, 17세기 영국을 몰아갔다.

잉글랜드에서 국교회 내에 여전한 구교적 잔재들을 칼뱅의 개혁 정신에 따라 청산하고자 청교도운동이 일어났다면 스코틀랜드는 국왕 찰스1세가 주도한 '기도서' 강요로 저항이 일어 언약도 운동(1638년)이 시작된다.

스코틀랜드는 진압에 실패한 왕당파가 의회를 장악한 청교도 지도자 크롬웰과 갈등이 깊어져 의회군과 내전(Civil war, 1642~1651)으로 이어졌다. 개혁의 완수를 바라던 스코틀랜드는 청교도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1643년 1월 시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5년 넘는 마라톤회의를 거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등 명실상부한 개혁교회의 근간을 마련한다.

내전에서 승리한 크롬웰은 국왕 찰스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성립했으나, 호국경에 오른 뒤 지나친 폭정의 반작용으로 그의 사후 왕정 복귀를 불러왔다. 불안한 정국 속 런던에는 흑사병(1665년)과 대화재(1666년)가 발생했고 스코틀랜드는 복위한 찰스2세의 배반으로 전쟁에 휘말려 보스웰 전투(1679년)에서 패배하고 1200명의 언약도들은 포로가 되어 '지붕 없는 감옥'에 갇혀 처형 당하게 된다.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1688년)으로 물러나기까지 무려 2만 명 가까운 언약도들이 희생됐다.

관용정책에 따라 피와 격동의 세기를 마치고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며 18세기 영국은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 확장에 따른 경제 부흥기를 맞이해 시민사회가 정착되고, 영적 부흥기와 선교의 위대한 세기의 초석을 놓게 된다.
국왕의 기도서에 반대하여 샌 자일교회에서 일어난 언약도들이 이듬해 인근 그레이프라이어리교회에 모여 언약서에 서명하는 모습.


# 영적 순례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생애

새로운 세기가 열린 1703년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 목사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의 19남매 중 15번째 자녀로 출생했다. 부모들은 공교롭게도 청교도 신앙적 배경을 떠나 국교회로 전향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목회자였던 부친이 부채 문제로 옥고를 치른 일과 어린 웨슬리가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택의 화재 사건 배후에는 비국교도 주민들과 갈등이 놓여있다고 보는 역사가들이 많다. 내전의 세기는 지나고, 상처는 아물었다 하나 국교도와 비국교도 사이의 갈등과 앙금은 여전했던 것이다.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의 선구자를 넘어 세계 기독교 역사에도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영적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그가 가진 신앙적 열정, 어려서부터 체득된 경건 훈련, 남다른 조직력 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마치 아름답고 완벽한 직물을 이루는 수많은 날줄 씨줄의 정교한 짜임같이 격변과 첨예한 갈등이 극심했던 시대적 배경, 가정적 환경, 깊고도 먼 곳에서부터 흘러온 신앙 유산이 그의 결단과 헌신된 삶을 만나 분출된 성령의 역사라 할 것이다.

한함 마운트 야외설교장에 세워진 안내판.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의 역사적 유산을 간직한 현장은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곳곳에 산재해 있다. 스코틀랜드의 던디 에딘버러에서부터, 뉴카슬 서남부 지역의 땅끝 콘월, 서쪽의 웨일즈에 이르며, 바다 건너 아일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위대한 사역지, 회심의 현장 뿐 아니라 그가 태어나 자란 곳, 생의 말년을 보낸 던 곳들도 역동적인 사건과 이야기들로 가득해 현장으로 찾는 이들에게 감동을 더해 준다.

감리교회의 첫 건물인 뉴룸은 웨슬리가 구호와 교육, 모임을 위해 마련했다. 순회 설교자들을 위한 숙소로도 사용됐다.
그는 평생을 영적 순례자, 복음의 선포자로 정치적 종교개혁에 누락된 내용성을 복음을 통해 채워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 고아와 노동자 등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했고, 시대를 앞서 노예 제도 폐지를 역설하며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직전까지도 윌버포스 등 운동가들을 격려했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구호뿐이었던 '만인제사장'이란 개혁의 정신을,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 사역자들을 세워, 주저없이 사역을 위임하고 동역함으로 몸소 보여준 실천가적 면모일 것이다. 이 모든 자료는 그의 꼼꼼함과 철저함의 또 다른 산물인 일기에 낱낱히 기록돼 전해진다.

규칙쟁이 웨슬리의 삶과 사역의 성취는 아이러니하게도 뜻밖의 만남과 급격한 전환을 통해 이뤄진 결실이라는 점이다.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투철한 청교도 신앙과 당시로서는 드물게 체계적 교육을 받았던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유년 시절 신앙과 교양을 받았다. 학문적으로도 유년시절 런던 차터하우스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옥스포드로 진학, 졸업 후에는 바라던 국교회의 성직자로 안수 받았다. 엡워스 부친 곁에서 목회 경험을 쌓은 뒤 옥스포드로 돌아온 그는 동생 찰스가 주도한 신성클럽(Holy Club)을 지도하고, 부친이 별세한 뒤 신대륙 아메리카에 복음 전파를 위해 투신하는 등 이력도 화려하다.

가정의 신앙적 배경이 든든하고, 학문적 성취로도 부족함이 없고, 더욱 공고해 가는 교회의 권위가 그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의 내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구함이 있었다.

브리스톨 뉴룸에 있는 웨슬리 상. 말을 타고 25만 마일을 여행했던 순회설교자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 교회 강단 막히자 야외서 순회 설교

폭풍 치는 바다 위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을 통해 경건주의와 조우한 그는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루터의 글을 통해 중생을 경험한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후 그는 독일 헤른후트를 방문, 진젠도르프 백작을 만나고 돌아왔으며, 60여 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한 송년 집회에서의 성령 체험을 통해 정형화된 강단에서 들을 수 없는 복음의 선포자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종으로 하늘과 땅의 인침을 받고 복음을 외치니 말씀을 전할 강단은 하나 둘 닫히게 되고 교회 지도자들은 그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웨슬리는 미국 대각성 운동의 주역이며 탁월한 설교가 조지 휫필드를 통해 새로운 땅으로 부름을 받게 된다. 1739년에 그의 일기에 따르면 브리스톨 행은 끊임없는 휫필드의 초대에 '주저하다 제비를 뽑아' 결정한 것이었다. 야외에서 설교하라는 요청에 그는 '언짢은 마음'으로 한함 언덕에 올라 첫 야외 설교를 하게 된다. 4월 2일이다. 이후 웨슬리의 순회 설교 사역은 시작됐고, 브리스톨은 그 중심이 되었다.

복음에 소외되었던 이들은 말씀을 듣게 되었고, 개혁의 공허함에 빠져 있는 교회는 영적 충만함과 뜨거움, 소그룹을 통해 성숙한 신앙을 형성해 가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한참 부흥과 선교를 구가하던 시절, '세계는 나의 교구'라던 그의 구호는 선교와 확장적 비전의 구호로 읽히기 쉬웠고 그렇게 회자되었다. 하지만 역사의 현장에서 다시 한번 교회를 돌아보며 다시 듣는 그의 고백은 '교구'(parish)로 관리되던 안이한 교회, 제도에 묶여 교회 밖을 외면했던 기득권의 한계를 넘어 안전한 사역, 보장된 영역을 뛰어넘어, 부르심 만을 좇아 두려움 없이 나아갔던 한 개혁자의 고뇌와 고백으로 다가온다.



김보현 목사 / 총회 파송 영국 선교사
감리교회의 첫 건물 '뉴룸'     '역사에게 내일의 길을 묻다' - 웨슬리, 구호·교육·모임 등을 위해 마련    |  2021.03.16 08:13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